태종 때 관상감정(觀象監正)을 지내고 물러났다가 세종 초기에 과학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 불러들여져 천문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3월 새로 세워진 관측소인 첨성대(瞻星臺)의 일을 맡아 같은해 10월의 지진과 11월의 혜성을 관측한 공로로 남양부사에 제수되었다. 함께 일한 이무림(李茂林)·최천구(崔天衢)·정영국(鄭榮國) 등도 경기 외 여러 고을에 제수되었다.
승정원에서는 이들을 갑자기 중용하는 것이 관례에 어긋난다고 거듭 반대했으나, 세종은 이를 물리치고 과학진흥의 의지를 뚜렷이 밝혔다.
이듬해 세종의 뜻에 따라 최천구·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관측 기구를 연구하다가 중국에 파견되어 그곳의 기구와 기술을 공부하고 다음 해인 1422년 귀국했다.
이들은 그 뒤 국내외에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세종조의 천문제도 확립과 운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25년(세종 7)에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을 완성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