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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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품
조선 후기(18세기 말경)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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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18세기 말경)의 불화.
내용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60㎝, 가로 300㎝.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감로탱은 수륙재·칠칠재·우란분재 등 영혼천도재에 쓰이는 불화로서, 하단탱(下壇幀)이라고도 한다. 도상은 고통스런 육도의 중생들이 불·보살이 내려준 감로(甘露)를 매개로 윤회의 업장을 소멸하고 극락으로 천도받도록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하단 육도 중생상의 표현은 현실 삶을 빌어 비교적 자유스러운 표현이 가능한 그림이다.

바탕 경전은 ≪부모은중경≫·≪우란분경≫·≪목련경≫·≪지장보살본원경≫·≪묘법연화경≫ 및 ≪밀교경전≫이 복합적으로 관계되었다. 정토내영도(淨土來迎圖)·육도회(六道繪)의 성격을 띤다.

일반적으로 감로탱 상단은 불·보살이 강림하여 청혼(淸魂)을 맞이해 가는 내영도(來迎圖)의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5여래(五如來)가 재단(齋壇) 바로 뒤의 연화좌에 앉아서 봉양을 받는 형식이다. 그리고 재단 아래의 양편에 두 여래가 각각 지장과 관음보살을 대동하고 내영해 있다. 상단 불·보살의 표현과 배치는 매우 독특하고 규모가 장대하다. 이렇게 지상으로 직접 여래가 내려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5불(五佛)의 뒤쪽으로는 과거 10불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제단 아래에 있는 아귀는 두 여래와 존자·인로왕보살 등의 시선을 받으며 밥이 수북히 담긴 그릇을 들고 있다. 이들은 상징적 존재로서 강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도상과의 상호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 앞에는 불·보살과 아귀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표현된 의식승(儀式僧)이 범패와 작법(作法)을 행하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주변에는 의식을 지켜보는 승려들과 객승(客僧) 그리고 일반 신도들이 둘러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재 의식 과정 표현은 실제의 대규모 야외 법회를 연상시키는 듯한 장중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의식 장면에는 ‘水陸大會設齋(수륙대회설재)’, ‘無遮平等會(무차평등회)’라는 기명(記銘)이 있어 감로탱의 성격이 수륙재(水陸齋)의 본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그림은 박락이 심한 편이기는 하나 그동안 전개되었던 감로탱과는 색다른 수작이다.

우선 전체 화면에서 하단의 비중이 매우 확대되었다. 그리고 하단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서민의 풍속도는 물론 왕궁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전면에 걸쳐 두루 펼쳐지고 있다. 화면 정 중앙에는 양 진영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 주는 전쟁 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주위를 청록의 산악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있다.

그 아래 화면에는 궁중에서 사용된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에나 나올 듯한 당당한 위풍의 소나무가 군데군데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궁궐인 듯한 전각이 화면을 분할하고 있다. 전각의 편액 중에는 ‘明鏡殿(명경전)’이나 ‘大明國金馬城門(대명국금마성문)’이라 하였는데, 실제로 그 곳에는 중국 사신의 모습이나 그들을 영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장중한 스케일, 왕궁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모습, 부분적으로 벽사(辟邪)나 수복(壽福)을 기원하는 도상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 특히 후궁에 의한 지원이 이 그림의 조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한국불화의 연구』(홍윤식, 원광대학교출판국, 1980)
『한국의 불화』(문명대, 열화당, 1981)
『감로정』(강우방·김승희, 도서출판 예경,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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