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정주 출신.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 같은 해 12월 27일상해에서 여운형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류민단 규칙에 기초해 조직한 상해거류민단(上海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었다. 그후 1921년까지 상해 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1921년 11월 25일 안창호(安昌浩)가 회장으로 있던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서 양헌(梁憲), 김구(金九) 등 12명과 함께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국제공산당으로부터의 지원금 문제를 둘러싸고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였다.
1923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 개편을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눠지자,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태극단(太極團) 대표로 참가해 안창호 등이 주장하는 개조파의 성명을 지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 교민단과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를 위해, 1920년 9월 교민단 조직 당시 제정한 교민조례를 개정하고 강제로 부과금을 징수했다.
1924년 8월에는 교민단 총무로, 1925년에는 의정원(議政院)평안도(平安道)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특히 최석순(崔錫淳) 등과 함께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건을 임시의정원에 제출, 이승만 축출에 앞장섰다.
1926년 3월 1일 한국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교민단장 대리총무로, 프랑스 조계 노북문(老北門) 민국로(民國路) 침예당(浸禮堂) 내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식사(式辭)를 낭독했다. 당시 식에는 3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이 밖에도 인도인 2명, 러시아인 3명, 영국·미국인 3명 등이 자리를 같이하였다.
1926년에는 인성학교 교사를 이전하여 새롭게 출범시키기도 하였다. 인성학교는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의 자질을 항상하기 위해 세워진 뒤 발전을 거듭해, 당시에는 졸업생수가 100여 명에 이르고 재학생이 50여 명 정도 되었다. 이 때 교장 조상섭(趙尙燮), 학감 황훈(黃勳)과 함께 인성학교 교감으로 활동했다.
1927년 4월에는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 창설을 위한 촉성회에 집행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이후 남경(南京)에서 활동하다 1930년 9월 피살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