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창성 출신. 이명은 기수(記守), 필성공(必成功).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창성군의 4월 1일 시위운동에 신용철(申容澈)·강이달(姜利達)·선우명(鮮于明)·선우황(鮮于晃)·문창수(文昌洙)·한선학(韓善學) 등과 참가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국내에서 활약하던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신, 1919년 4월 중국 안동현(安東縣) 구시가(舊市街) 풍순전(豊順錢)에서 조직하였다. 총재는 안병찬(安秉瓚), 단장은 함석은, 서기는 장자일(張子一), 간사는 박영우 등이었고, 주요 성원은 20대였다.
강제하가 활동한 이 조직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자금조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을 널리 선전하였다.
1920년 9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는 등 여러 차례 단원을 국내로 파견, 자금모집과 조선인 관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배포하는 선전·선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8월에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서는 김동삼(金東三)(중앙집행위원장), 이웅해(李雄海)(민사위원장), 이동산(李東山)(산업위원장)과 함께 교통위원장(交通委員長)·재무부장(財務部長)·사판장(司判長)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정의부(正義府)에서도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이상룡(李相龍)의 임정 국무령(臨政國務領) 취임 문제로 일어난 내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열린 군민대표회의 결의에 따라, 정의부의 명칭은 그대로 두고 중앙의회의 성립을 볼 때까지 대임위원 및 중앙행정위원을 뽑았다. 이 때 강제하는 대임대표회(代任代表會)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정의부는 1926년 10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17일간 길림성반석현(盤石縣)에서 제3회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김이대(金履大)를 의장, 박범조(朴範祚)를 부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해 헌장을 개정하였다. 이 때 중앙위원을 5명에서 11명으로 증원했는데, 강제하는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부는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아, 초등교육을 의무화해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고,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와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화성의숙(樺成義塾),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였다. 강제하는 화전현(樺甸縣)에 설립한 화성의숙의 재무(財務)로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정의부에서 독립군 모집 관전현(寬甸縣)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全民族唯一黨) 조직회의(組織會議)에 정의부 대표로 국민부(國民府)의 결성에 참여했고, 1929년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