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출신.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 1912년 서울로 유학,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자 서무책임자로 활동했는데, 특히 조선노동공제회 내의 볼셰비키파에 반대해 이들을 폭행하고 회관 간판과 서류를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1922년 8월에 검거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이즈음 제주도에서 제주해녀조합 설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 8월 제주흥학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해 ‘우리의 전도(前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4년 3월 대판에 가서 최선명(崔善鳴)이 조직한 남흥여명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최선명, 김태엽(金泰燁)과 함께 같은 해 6월 조선무산자사회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8월에는 대판조선노동동맹회·삼일청년회·남흥여명사 등과 공동으로 조선인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朝鮮人言論集會壓迫彈劾大會) 등을 개최하였다.
1925년 조선여자보호회를 조직하고, 제주도 출신 여공의 대우 개선과 권리 옹호를 표방하여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의 대우개선, 분쟁 등에 관여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인신진회 창립에 관여하였다. 자유노동자 문제에도 주목, 사카이(堺)조선자유노동연맹의 조직화에 참여하였다. 특히 대판의 사카이시(市)에 살면서 조선일보 사카이지국장도 겸하였다.
1925년 여름 조선수해이재민구제운동에서는 의연금 모집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조선대수재이재동포구원단(朝鮮大水災罹災同胞救援團)’을 조직하였다. 특히 사카이에서는 문명비평사(文明批評社)의 대관효지조(大串孝之助)와 함께 구원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26년 조선신진회의 윤혁제(尹赫濟)와 아세아민족대회반대운동(亞細亞民族大會反對運動)을 제창하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대판연합회와 제휴하여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 이후 무정부주의사상이 퇴조하자 운동에서 떨어져나왔다. 1946년 2월 재일본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재일거류민단 제2대 단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