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통진(通津: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출신. 이명은 김윤서(金允西). 박래병(朴來秉) 의병에 가담하여 경기도 통진·고양(高陽) 일대에서 활동했다.
1907년 8월 박래병은 의병을 일으켜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김경운은 수백 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경기도 포천(抱川)·음죽(陰竹)·이천(利川)·광주(廣州)·가평(加平)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치렀다. 같은 달 300명으로 부대를 재편하여 지영기 부대와 연합해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렸다.
1907년 9월 1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영평(永平) 등지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12월에는 동지 180여 명과 경기도 통진군(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고양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김경운은 경시청 감옥에 복역 중 1907년 9월 18일 서울 수표교 부근 외역장을 탈출하여 경기도 광릉 내에 근저지를 두었던 박래병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전쟁을 참가했다.
김경운은 박래병 의병군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하는 한편 군자금품 수합활동을 했다. 특히 통진군에서는 엽전 2,300냥과 군수품, 그리고 고양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냈다. 그리고 선등사(先登寺)·석지원(石池原)·송내기(松來基)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치렀다. 체포되어 1908년 11월 6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고 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