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금산 출신. 1908년경부터 문태수(文泰洙) 의병에 참가해 삼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문태수는 경남 안의(安義) 사람으로, 을사조약으로 자주적인 외교권이 박탈된데다 통감정치로 황제의 통치권이 약화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 1906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전북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9월 하순에는 전북 장수읍(長水邑)을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7년 1월에는 전북 무주군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적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여 정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12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각도 의병군이 모여 13도창의군을 편성할 때 문태수는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강이봉은 유종안(柳鐘安) 등과 함께 문태수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2월(음력)부터 1909년 9월(음력)까지 경상남도 안의군(安義郡) 북상면(北上面) 이장 이모(李某)의 집에 침입해 총과 모피를 강제로 빼앗고,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조치리(鳥峙里)최만오(崔萬五)의 집에서 현금 20원, 충청북도(忠淸北道) 영동군(永同郡) 이모(李某)의 집에서 통화 20원을 빼앗아 의병군수품과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09년 9월 2일(음력) 문태수 등 11명의 동지와 함께 경부선(京釜線) 이원역(伊院驛)에 불을 질러 역사를 모두 불태우고 일본인에게서 군자금을 탈취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