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재기(載起), 호는 청계망사(淸溪妄士). 고조부는 중화재(中和齋)강응정(姜應貞)이며, 아버지는 광흥창봉사강령(姜齡)이다. 학문은 그다지 깊지 않았으나 여러 편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
시조 작품인 「수월정청흥가(水月亭淸興歌)」 21수에는 청계망사로 자처하던 강복중의 삶과 아픔과 한이 서려 있는데, 시국에 대한 그의 불만이 담겨 있으며 그의 작시관(作詩觀)이 잘 드러난다. 이 작품 외에도 시조 49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또 두 편의 장편가사 「위군위친통곡가(爲君爲親痛哭歌)」와 「분산회복사은가(墳山恢復謝恩歌)」를 남겼는데, 이들은 진정문학(陳情文學)의 주목할 만한 작품일 뿐 아니라, 한 선비의 조상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당시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위군위친통곡가」는 병자호란 후의 피폐한 시대상(時代相)을 바라보던 작자가 연주충분(戀主忠憤)의 감개와 우국경세(憂國警世)의 생각을 읊으면서, 순상(舜象)의 변을 만난 집안의 애달픔과 그를 괴롭혔던 악당들에 대한 분노를 통탄한 작품이다.
「분산회복사은가」는 ‘선산회복가(先山恢復歌)’라고도 하는데, 작자가 선산인 중화재 효자 강응정(孝子 姜應貞) 묘소의 변(투장)을 해결하기 위하여 응송한 지 60년 만에 충청감사로 부임한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의 도움으로 선현의 분산을 회복하게 된 데 대한 반가움과 고마움을 노래한 것으로, 당시의 인정세태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