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거돈사지에 있는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1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탑비의 주인공인 원공국사 지종(智宗)은 930년(태조 13)에 출생하여 1018년(현종 9) 89세로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이다. 그는 광종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법안종의 승려로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종은 8세 때 개경의 사나사에서 삭발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953년(광종 4)에 봉암사로 갔으며 이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러 있었다. 30세가 되는 해인 959년(광종 10)에 고달원의 증진대사 찬유가 꿈에 나타나 중국 유학을 권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을 갔다. 41세가 되는 해에 다시 찬유가 꿈에 나타나 귀국을 종용하니 고려로 돌아왔다. 970년(광종 21) 귀국한 지종은 광종으로부터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고 금광선원에 거주하였다. 이후 지종은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대까지 왕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지종은 대선사를 거쳐 84세인 1013년(현종 4)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87세인 1016년(현종 7)에는 질병을 얻어 하산을 권유받았다. 당시 지종은 수도인 개경에 머무는 것은 ‘자리(自利) 때문이 아니라 타리(他利)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2년 후인 1018년(현종 9) 4월 왕에게 하직하고 거돈사로 하산하였다. 4월 17일 8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4월 22일 장례를 치렀다. 입적 후 원공국사로 추증되었다.
지종이 입적한 직후 원공국사승묘탑이 조성되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은 팔각당 형식이며 신라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단정하고 균형잡힌 형태와 격조 있는 장식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비는 1025년(현종 16)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썼다. 각자는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담당하였는데, 구양순(歐陽詢) · 구양통(歐陽通) 부자의 서법이 어우러진 서체이다. 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탑비의 세부를 살펴보면, 수 매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탑비를 조성하였다.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과 ‘만(卍)’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귀갑문 끝부분에는 테두리가 둘러져 있으며 그 위에 4엽의 화판을 가진 꽃문양이 시문 되어 있다. 귀갑 상부에는 방형의 비신 받침이 있다. 비신 받침 측면에는 화려한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안상 중앙에는 꽃봉오리가 솟아나 있다. 꽃봉오리가 중앙에서 솟아난 형태의 장식을 갖춘 안상은 11세기에 주로 유행한 문양 형식이다. 용두는 뺨의 측면에 지느러미와 유사한 비늘이 있는 어룡형이다. 비신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글자의 판독도 용이하다. 비신 위에는 방형의 이수가 있다. 이수 하단에는 수직선으로 장식하였으며 수직선 위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하게 조각하였다. 구름 위에는 정면 2마리, 측면 각 1마리, 후면 3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상면에는 보주를 중심으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9마리의 용이 이수에 조각되어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기본적인 외형은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와 유사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점, 귀갑 위에 새겨진 문양의 형식화가 진행된 점, 이수의 운룡문 조각이 평판적인 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 승탑과 탑비의 건립은 문도들의 주도로 현종과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광종 타계(975) 이후 경종 · 성종 · 목종대에는 승탑을 조영했던 사례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즉 고려 초 승탑과 탑비의 건립 전통이 잠시 단절되었고, 현종대와서 원공국사탑비의 건립을 계기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는데, 원공국사탑비가 인근에 있는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와 조각 기법상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