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홍도(河弘度: 1593~1666)는 조선 후기 학자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이다.
『겸재문집(謙齋文集)』은 12권 6책의 목활자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
이 문집은 초간본과 중간본이 존재한다. 증손 하대관(河大觀)과 족손(族孫) 하대명(河大明)이 하홍도의 시문을 수집하여 편차했고, 유고와 연보, 부록을 합쳐 6책으로 정리한 뒤 1739년 김성탁(金聖鐸)에게 교감을 의뢰하고 서문을 청탁했다. 연보 교정은 김성탁이, 문집 교정은 오광운(吳光運)이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익(李瀷)이 하대관에게 보낸 편지와, 조인영(趙寅永)의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수록된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보면 문집은 1758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초간본이 널리 유포되지 못해 유문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영남의 사림들이 비용을 마련하여 하홍도의 후손 하성로(河性魯)를 도와 1912년에 중간본을 간행했다. 중간본은 목판본으로 12권 6책이고, 초간본과 편차가 다르다.
권두에 이익과 김성탁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별집으로 「사우문인록(師友門徒錄)」이 실려 있는데, 이는 저자와 친교가 있었던 102명의 사우와 문인들에 대한 자 · 호 · 본관과 가계, 행록 등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권1에는 오언절구 36제 43수, 칠언절구 120제 144수, 오언율기 25제 26수, 오언배율 1제 1수가 실려 있다. 권2에는 칠언율시 48제 53수, 오언고시 9제 9수, 칠언고시 7제 7수, 부 11편, 애사 4편이 실려 있다. 권3~6은 편지글로 각각 44편, 47편, 40편, 11편이 실려 있다. 권7은 제문 18편, 소 1편이고, 권8은 구묘문(丘墓文) 6편, 비명(碑銘) 6편, 행장 2편이다. 권9에는 상량문 5편, 창의문(倡義文) 1편, 서 · 발 · 기 · 설 16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0에는 서 · 발 · 기 · 설 9편과 잡저 5편이 실려 있다. 권11에는 묘갈, 묘지명, 행장 등 9편, 권12에는 제문 21편, 만사 72편, 행록 1편이 실려 있다.
시는 덕천서원 관련 작품,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운(韻)에 차운한 시, 만시(挽詩)가 주를 이루며, 「과산제동유회(過山祭洞有懷)」, 「차야은길선생운(次冶隱吉先生韻)」, 「애삼충사(哀三忠祠)」 등과 같이 우국애민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도 있다.
「철주장부(鐵柱杖賦)」는 송나라 고종(高宗)과 효종(孝宗)이 주희(朱熹)와 장식(張栻) 같은 뛰어난 현인을 채용하지 못해 끝내 설욕하지 못함을 탄식한 글이며, 「한소청백탁여니(寒素淸白濁如泥)」는 한나라 영제 때 매관매직이 극에 달하여 피폐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서원(西園)을 설치하고 공개적으로 관작의 값을 매겨 팔고 산 것을 비판한 작품이다.
「답향교문목(答鄕校問目)」은 향교에 배향된 고려 인물 4명이 소목(昭穆)의 차례에 따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배향해야 함을 논한 편지이며, 「답서계서원문목(答西溪書院問目)」은 서계서원에서 오건(吳健)의 문집 간행에 앞서 편차에 관해 문의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사은겸진군도구사소(謝恩兼陳君道九事疏)」는 1662년 저자가 학문과 행실을 인정받아 쌀과 콩을 하사받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임금의 도리를 아홉 가지로 논한 글이다. 「정묘호란창의문(丁卯胡亂倡義文)」은 정묘호란 당시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글이다. 「연구속선서(聯句續選序)」는 아동용 한시 교육 교재인 『백련초(百聯抄)』의 단점을 보완하여 「연구속선」을 편찬한 뒤 그 서문으로 작성한 글이다.
「교중거행절목(校中擧行節目)」은 향교에서 시행할 사안들을 7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고, 「계례집설(笄禮輯說)」은 남자의 관례에 비해 경시된 여자의 계례를 복구하기 위해서 「곡례(曲禮)」, 「내칙(內則)」, 「상복소기(喪服小記)」, 「단궁(檀弓)」, 「사혼례(士婚禮)」, 『소학』 등의 고전에서 계례 관련 기록을 발췌하여 모은 것이다.
『겸재문집』은 저자의 학문적 · 문학적 면모를 두루 보여 주는 귀중한 문헌으로, 특히 남명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