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내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약 6㎞ 떨어진 곳에 있다. 배동의 서천(西川) 동안(東岸)에는 소나무의 노거목이 있고, 모량천(毛良川)과의 합류점 부근에는 가슴높이둘레 100㎝에 달하는 왕버들이 몇 그루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서안(西岸)은 소나무와 왕버들이 더 많이 자라고 팽나무도 뒤섞여 자라는 숲이다. 그 가운데 소나무숲은 가슴높이 둘레 최대의 것이 70㎝에 이르고, 울폐가 잘 유지되고 있다. 이 숲은 목랑(木郎)을 제사한 곳인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의 집사(執事) 비형(鼻荊)은 뭇 귀신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하룻밤 동안에 귀교(鬼橋)라는 큰 돌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며, 길달(吉達)이라는 귀신을 추천해서 서정(庶政:온갖 政事)을 보좌시키기도 하였다.
그 뒤 길달이 도망을 가자, 비형은 다른 귀신으로 하여금 길달을 잡아서 죽였으므로, 다른 귀신들은 그때부터 비형을 크게 무서워하고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도망을 치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비형을 가사로 한 것을 문간에 붙이고, 잡귀신을 쫓아내는 부적으로 삼는 향속(鄕俗)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목랑이라고 말하며, 한편으로는 두두리(豆豆里)라고 칭하였다. 왕가숲은 이 목랑을 제사하는 곳이었다.
1231년(고종 18) 몽고 병사들이 침입해 왔을 때 목랑의 신탁(神託:신의 분부와 명령)을 숭앙하는 바 있었으나 영험이 없었다고 한다.
비형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의한 것인데, 그 내용은 행복을 주는 귀신은 재앙을 만들어 내는 귀신을 사역할 수 있고, 사람이 재앙을 면하자면 그 통솔자인 지배의 신에게 의뢰해서 잡귀신을 다스려 줄 것을 부탁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불을 제사하자면 큰 나무가 있는 숲이 좋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신은 하늘에 살고 있고, 땅으로 내려오려면 키 큰 나무를 이용하는 것이 교통상 편리할 뿐 아니라, 숲은 원만하고 깨끗한 것이므로, 신을 모시는 데에는 가장 알맞은 환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왕가숲이 선택된 것이다. 왕가숲은 처음에는 일종의 종교림(宗敎林)이었고, 후에 수리(水利)를 위해서 기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