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조신화」는 고려를 세운 왕건의 선조 6대들의 내력과 자취를 다룬 고려의 건국신화이다. 왕건의 6대조 호경, 5대조 강충, 4대조 보육, 3대조 진의, 할아버지 작제건, 아버지 용건을 각기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가지 이야기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전하고, 선계의 혈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려 왕권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선조의 행적에서는 신화적 상징이 드러나고, 왕건의 투쟁과 승리에서는 경험적 세계를 서술하는 역사성이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왕건의 6대조 호경(虎景), 5대조 강충(康忠), 4대조 보육(寶育), 3대조 진의(辰義),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아버지 용건(龍建)을 각기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전하는데, 여기에서 자료의 출처를 12세기 말의 인물인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편년통록(編年通錄)』이라고 밝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단편적인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들도 『편년통록』을 전거(典據)로 삼고 있으며, 내용도 축약되어 있다. 국문학에서는 「작제건 신화」로 통칭하기도 한다.
6대조 호경은 활을 잘 쏘았고, 스스로를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칭하였다. 그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여러 곳을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다. 하루는 사냥하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밤을 새우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경과 동행하였던 열 사람이 합의하기를, 관을 던져 호랑이가 무는 관의 임자를 호랑이에게 내주기로 하였다. 호랑이는 호경의 관을 물었다. 이로 인해 호경이 굴에서 나가자, 바위굴이 무너져 그 속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호랑이는 그냥 사라졌다. 호경이 죽은 사람들을 장사 지내면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산신이 나타난다. 산신은 호경에게 자신이 과부라고 하며, 호경에게 자신과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神政)을 펴자고 말한 후 호경과 함께 숨어 버렸다. 그 고장 사람들은 호경을 대왕이라고 하면서 산신과 함께 받들었다.
이후 호경은 원래의 아내를 찾아가, 아내와 관계를 맺고 강충을 낳았다. 5대조 강충은 후손 중에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나오리라는 풍수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송악(松嶽)에 소나무를 심었다.
4대조 보육은 지리산에서 도를 닦았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오줌을 누었더니 삼한이 온통 바다가 되는 꿈이었다. 보육의 형은 보육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자기 딸인 덕주(德周)를 보육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보육과 덕주 사이에서 두 딸이 태어났다. 큰딸도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천하가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작은딸 진의가 그 꿈을 샀다. 이후 진의는 바다를 건너온 귀인(貴人)과 함께 잠자리하고 작제건을 낳았는데, 그 귀인은 나중에 당나라의 숙종(肅宗)이 되었다.
2대조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다. 작제건은 16세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데, 어느 곳에 이르자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더니 고려 사람을 배에서 내리게 해야 한다고 하였고, 작제건은 바다에 남게 되었다. 그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작제건에게 부처로 변신하여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활을 쏘아 그 여우를 퇴치하였고, 그 보답으로 여러 가지 보물을 얻었다. 그리고 용왕의 딸[龍女] 저민의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작제건과 아내 저민의는 용궁에서 얻어온 돼지를 따라가 집터를 잡고 살았다. 그러다가 저민의가 용궁으로 가는 장면을 작제건이 엿보는 바람에, 저민의는 용이 되어 영영 가 버리고 말았다.
작제건과 저민의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장남인 용건은 길을 가다가 꿈에서 배필이 되기로 약속하였던 미인(몽 부인(夢夫人))을 만나 드디어 혼인하였다. 그리고 도선(道詵)이라는 풍수가가 예언한 대로 과연 왕건이 출생하여 삼한의 주인이 되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 시조(始祖)의 고귀한 혈통을 내세워 건국의 유래와 정당성을 입증하는 건국신화를 짓는 일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고려도 이러한 전통에 따라,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선조들의 신화 같은 유래를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세워진 때는 이미 신화시대(神話時代)가 아니어서, 건국의 주인공이 하늘과 통하는 신이(神異)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국조신화」는 선조들을 동명왕 · 박혁거세 · 수로왕(首露王)과 같이 처음부터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 세속적(世俗的)인 인간으로 존재하다가 특정 과정을 거쳐 신성한 존재가 된 것으로 설정하였다. 고려 선조의 계보와 혈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려 왕권의 신성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6대조인 호경은 여성 산신과 맺어졌고, 2대조 작제건은 용왕의 딸 저민의와 맺어졌다. 이를 통해 고려의 선조들은 세속적인 존재에서 신성한 존재가 되는데, 이는 용호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체성을 용의 후손으로 여기는 의식과 관련이 있으며, 고려 왕조가 이른바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3대조 진의의 이야기나 왕건의 어머니인 몽 부인의 이야기와 같이, 신이한 요소가 개입되어 왕권 혈통에 기여한 여성의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남녀의 결연 과정에서 여성 인물들은 건국 주인공을 출산하는 역할 이외에도, 가계의 신성함을 적극 수용하거나 신성한 혈통을 이입시키는 등 ‘신성화’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의가 꿈을 샀다는 내용은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희매몽 설화」에서도 나타나고, 작제건의 이야기는 「거타지 설화」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따라서 이 신화는 전대에 이루어진 설화(說話)를 수용하면서 창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역사 시대(歷史時代)에 들어와서 고대의 건국신화와 민간 영웅의 전설(傳說) 사이의 중간적 성격을 가진 이야기가 생겨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6대조 호경을 신라 때 왕족 칭호인 성골(聖骨)이라 하거나, 5대조 강충을 6두품의 최고 직위인 아간(阿干)이라 하는 등, 혈통의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라의 관습을 끌어들였다. 또한, 신분이나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작제건을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고 한 데서는 사대(事大) 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혈통의 고귀함이나 신성성을 나타내는 데 있어 전설적인 증거력을 부여하기 위한 설화의 일반적인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국조신화」는 고대 신화(神話)의 전례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다만 선조들만을 주인공으로 삼고 왕건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없어, 고대의 건국신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결국 선조의 행적은 신화적인 상징을 통해서 부각되도록 만들고, 왕건 자신의 투쟁과 승리는 경험적 세계를 서술하는 역사의 영역으로 아우르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전례는 조선왕조의 건국 서사시(敍事詩)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 국조신화」는 6대 성골장군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지맥(地脈)을 살펴 내려와 개경에 자리 잡는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5대 강충이 풍수가(風水家)로부터 장차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이 개경에서 나올 것임을 예언 받는 등, 「고려 국조신화」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원리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중세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장치로서 신화적 시간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 속에서 새로운 합리화의 기제로서 풍수지리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는 해설이 있다.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이후에 전래하여, 경주가 중심지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신라말 호족(豪族) 세력들의 국토 재편 의욕을 촉발하였다. 이후 고려가 건국되어 국토의 중심이 경주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 풍수지리는 새로운 지식 체계로 적극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