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창사설화는 용신과 관련하여 사찰이 세워진 내력을 풀어주는 불교설화이다. 『삼국유사』에 많이 발견되며, 용신신앙이 정착된 상황에서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이 유입되어 사찰이 창건됨에 따라 두 신앙체계가 충돌한 결과로 이 이야기가 창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야기 유형은 용신을 기리는 사찰이 지어지는 이야기, 용신을 호법으로 교화시키는 이야기, 독룡을 퇴치하고 사찰이 세월진 이야기 등으로 구분된다. 『삼국유사』의 사찰설화에 등장하는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룡,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 퇴치의 대상인 독룡 등으로 나타난다.
사찰의 창건(創建)에 용이 관련된 설화(說話)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많이 등장하지만, 다른 문헌설화(文獻說話)에도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송고승전』의 선묘설화(善妙說話)는, 용이 부석사(浮石寺)의 터전 마련과 창건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점이 언급되어 있어 소중한 사례가 된다. 의상(義湘)을 흠모(欽慕)하던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줄 법복(法服)과 여러 물건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의상의 배는 이들을 싣기도 전에 신라로 떠나갔다. 의상은 서원(誓願)하며 상자를 바다에 던졌고, 배에 이르러서 배를 호위하는 용이 되어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이후 의상이 신라에서 경전(經典)을 공부하기에 적절한 터를 구하자, 선묘는 의상을 보호하는 뜬 돌[浮石]이 되어서 부석사의 기틀을 닦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선묘는 옷가지 · 용 · 암석 등으로 변화하면서 호법(護法)의 신이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마침내 부석사를 창건하는 계기를 부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감은사(感恩寺)의 유래담(由來談)도 용신창사설화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감은사를 짓게 된 내력은, 문무왕(文武王)이 죽어서 왜적을 막는 호국룡이 되기 위해 바다에 무덤을 쓰고 절을 짓게 했다고 하는 것이 요점이다. 문무대왕의 호국룡이 감은사의 금당 계단까지 넘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두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감은사 창사(創寺)의 유래담이다. 용신과 관련지어 절을 짓는 내력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에는 용신의 출현으로 절을 지은 내력이 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계유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도 용신과 관련하여 절이 지어진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에 갔다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는데, 동해 용왕을 위한 절( 망해사(望海寺))을 세웠더니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개운포가 되었다. 그리고 동해 용왕이 이를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서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용왕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처용(處容)이다.
용신창사설화는 사찰을 세우는 과정에서 토속적인 용신신앙이 불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한 지역에 용신신앙이 정착된 상황에서,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이 유입되어 사찰이 창건되는 사건으로 인해 두 신앙 체계가 충돌한 결과가 용신창사설화로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1) 용신신앙 기반 이야기 용신신앙의 내용이 설화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용신을 위해 사찰이 창건되었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 망해사 · 황룡사 · 대화사 · 감은사(感恩寺) 등의 창사설화가 이에 속한다.
(2) 용신신앙이 불교신앙 체계로 흡수되는 이야기 부처‧보살(菩薩)이나 고승(高僧)이 구도(求道)하는 과정에서 성지(聖地)를 용신신앙 터에 잡으면서 용신을 호법으로 교화(敎化)시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의 부석사 · 금산사(金山寺) · 작갑사 등의 창사설화가 그러하다.
(3) 용신신앙과 불교가 갈등하고 충돌하는 경우 불교가 용신을 패배시키고 사찰을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용은 독룡(毒龍)으로 퇴치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삼국유사』의 통도사(通度寺) · 옥룡사(玉龍寺) · 보림사(寶林寺) · 만어사(萬魚寺) 등의 창사설화가 그러하다.
이처럼 용신신앙과 불교 두 신앙의 습합(習合) 양상 및 지역적 특색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로 전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용신신앙은 정통성과 권위, 농경 사회에서의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존재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에서는 전통적인 용신신앙이 불교적으로 재해석되면서 복잡한 양상의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보면, 용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호법의 역할이나 나라를 지키는 호국(護國)의 기능을 담당하고, 절이 지어지는 유래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다양한 모습에서는 전통적인 용 신앙이 불교의 용 관념과 대립하면서 습합 되는 당시 상황을 추론해 볼 수 있는데, 그 양상에 따라 용이 불법과 국토의 수호자가 되는 선룡(善龍)으로 나타나거나 불법에 귀의하지 않는 독룡으로 변하기도 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을 수용하며 민간신앙(民間信仰)을 불교화시키려는 관점으로 창사설화를 선별적(選別的)으로 수록하였고, 구비문학(口碑文學) 내에서는 비교적 용신신앙의 잔존(殘存) 형태가 나타나며 불교적 신앙 체계에 습복당하지 않는 민간신앙의 맥이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불교에서 유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용이 불법도 수호하고 불국토인 나라도 수호한다는 기능적 차이는 주목할 만하다. 용이 나라를 지킨다는 점에서 같고 불교를 공인(公認)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국사(國師)나 왕에게 부여된 임무였으므로 이러한 차별성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승려(僧侶)가 비법(祕法)을 전수하는 데도 용과의 친연성(親緣性)을 가진 사례들( 「명랑신인(明朗神印)」 ·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 「원성대왕(元聖大王)」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호법룡(護法龍) 신앙이 널리 퍼진 가운데 이러한 설화가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