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수동리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 부안면에서 선운사로 가는 도로에서 약 200m 남향한 구릉 위 작은 저수지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창 분청사기 요지는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高阜郡 磁器所 二 皆郡西 扶安串 品下(고부군 자기소 이 개군서 부안곶 품하)”라고 표시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고부군이 고창군에 병합되었으므로 지금의 고창 분청사기 요지는『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등장하는 고부군 서쪽에 있는 부안곶의 하품 자기소 두 곳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고창 분청사기 요지에서는 조선 초의 상감, 인화, 조화, 귀얄 기법 등으로 장식된 15∼16세기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 잔이 주를 이루고 항아리와 커다란 사발도 일부를 이루었다. 그릇의 색은 회청색을 띠고 표면이 거칠어 정제가 잘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양은 연화와 어문, 모란 등이 큼직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전라도 지역 분청사기 가마에서 흔히 확인되는 ‘내섬(內贍)’명이 새겨진 편들이 출토되어, 관청용 분청사기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화기법으로 장식된 ‘내섬(內贍)’명 편 분청사기는 중앙관아인 내섬시에 상납하기 위해 제조된 그릇임에도 여러 개를 포개구이하였다. 이러한 점은 고창 분청사기 가마가 인화문기법 분청사기의 말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특히 표면이 뽀얗게 백자화된 백토분장과 백자에 사용되는 문양과 유사한 음각 문양은 고창 분청사기 가마의 특징이다. 분청사기 대부분이 조질이므로 관아용 뿐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용 도자기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 고창 분청사기 가마는 대체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활동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고창 분청사기 요지는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가마가 어떻게 실존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분청사기의 다양한 기법과 장식 등의 양식적 변천과 당시 공납용 자기와 민수용 자기의 차이점, 분청사기가 점차 백자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마 유적과 출토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