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는 아산 댐 건설로 인해 1983년 3월 30일부터 7월 16일까지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서 긴급히 발굴한 곳이었으나 다행히 댐의 수위가 가마터보다 낮아 현재 수몰되지 않고 보존된 상태다. 가마 유구는 남쪽으로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퇴적구릉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세 개의 가마가 상하로 중첩하여 축조되었다. 한편 퇴적구릉에서 확인된 여러 개의 건물지에서 ‘태평임술(太平壬戌)’명(1022) 기와편이 발견되었으며 초기 청자의 특징인 해무리굽 청자완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가마터의 활동연대를 짐작케 하는 유물로 추정된다.
고창 용계리 청자 가마의 발굴 결과 3기의 가마(A, B, C가마로 명명)가 중첩되었고 이에 따라 3차에 걸쳐 가마 벽이 보강되었으며, 보강되는 동안에 가마 바닥은 모두 13회에 걸쳐 7cm 두께로 보토되었음이 드러났다. B가마는 길이 약 38m, 너비 1∼1.1m, 천장 높이 1.1m로 추정되는 지상 단실요로서 가마 내벽은 갑발과 석재를 점토와 섞어 쌓고 외벽은 잡석을 점토와 섞어 쌓았다. 측면 출입구는 아궁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서 5∼5.5m 간격으로 모두 4곳이 확인되었는데 출입구의 너비는 50∼60㎝이다.
출토 도편은 모두 청자로 대접, 접시, 뚜껑, 합, 병, 항아리, 잔과 잔받침, 주전자 등으로 종류가 다양하며, 특히 완의 굽은 접지면이 깎아낸 면보다 더 넓은 소위 해무리굽 중에서 옥가락지 형태에 가까운 옥환저이고 그릇 안쪽에 둥그렇게 깎아낸, 소위 한국화된 해무리굽인 점이 특징이다. 무늬는 민무늬가 대부분이지만 음각과 양각기법도 있다. 유색은 비색청자로 발전하지 못하고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 등을 띠며 태토는 치밀하고 굽다리 4∼6곳에 얇은 내화토를 받쳐 포개어 구운 것이 특징이다. 또 원통형의 갑발은 기호를 음각한 것도 있고 측면과 상면에 1∼7개의 구멍을 뚫은 것도 있다. 이외에도 사발 모양의 갑발과 갑발 받침 그리고 연질토기편도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주로 작업용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태평임술’명 평기와편이 건물지에서 출토되었고 이것과 동일계로 판단되는 기와편이 가마 벽에 섞여 있어 용계리 가마의 활동연대를 추정하게끔 한다.
건물지에서 확인된 ‘태평임술’명 기와편의 상단은 대부분이 결실되었고, 하단 역시 일부 결실되어 있다. 기와편의 등쪽에는 문양과 명문이 찍혀 있는데, 상단에는 비교적 가는 어골문(魚骨文)이, 하단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어골문 기와조각이 가마 북벽에서도 출토됨에 따라 용계리 가마가 1022년 전후에 운영되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명문을 ‘태평임술’로 판독할 수 있을지의 문제와 ‘태평임술’명이 발견된 건물지와 요지 사이에 연결된 층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출토된 청자 해무리굽은 용인 서리 등의 초창기 해무리굽과는 다른 형태로, 상대적으로 초기 청자의 다음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계리에서 출토된 해무리굽 형식은 11세기 말까지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용계리 요지는 고려 전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경기 일원과 황해도의 중서부지방과 강진 등의 남서부지방 초기청자요들의 경계 지역인 고창에서 어떻게 요업이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마다. 중부에서 남부로 기술적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정할 때 시기적으로도 용인서리와 같은 초창기 가마터의 기술과 양식이 다음 시기와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용계리 요지의 발굴 성과는 고려청자의 변천과 특히 중서부지방과 남서부지방 초기청자의 상호 영향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