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백자·청자 등을 굽던 가마터.
개설
내용
7기의 가마 중 2호 가마가 복원되어 현재 보호각 안에서 전시 중이다. 2호 가마는 총 길이 20.6m, 너비 1.3m 내외의 규모로서 서쪽 벽(아궁이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6곳의 측면 출입구가 있으며 13도의 경사면에 진흙과 돌로 축조하였고 전체 가마의 소성실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오직 하나로 구성된 ‘단실요’ 구조이다. 번조실 바닥은 진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으며, 측면 출입구가 있는 곳의 바닥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아궁이는 길이 1.7m, 너비 1.6m로 원형이고 번조실로 올라가는 불턱의 높이는 약 90㎝이며 진흙과 돌로 축조했다. 아궁이의 입구는 양쪽에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현재의 너비는 35㎝이다. 굴뚝 시설은 연기에 그을린 돌무더기로 인해 돌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연도로 생각되는 길이 60㎝, 너비 40㎝의 골이 있다.
충효동 가마의 활동시기는 『세종실록』「지리지」무진군조(茂珍郡條)의 “자기소 1 재군동 이점(磁器所 一 在郡東 梨岾)”이라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광산현 토산조의 “자기 현동 석보리(磁器 縣東 石保里)”라는 기록을 통해 1420년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 요업을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 유물은 분청사기가 대부분이며 그 다음으로 백자와 청자가 차지한다. 그 밖에 흑유, 토기, 요도구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가 주종을 이루고 합, 발, 호, 병, 매병, 제기, 마상배, 잔, 장군, 벼루, 주자 등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었다. 장식적으로는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에는 인화문이 가장 많고 병과 항아리에는 상감, 조화, 박지문양이 있으며,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귀얄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백자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는 태토의 강도가 연질과 경질로 뚜렷이 구분되며, 분청사기와 연질백자는 한 가마 안에서 함께 소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그러나 조질의 인화분청에는 장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正閏二(정윤이)’, ‘公別(공별)’, ‘光(광)’, ‘光公(광공)’, ‘光別(광별)’, ‘光上(광상)’ 등 날짜와 지명을 표시한 예가 많이 확인된다. 기명의 위치는 내저 중앙, 굽 안바닥 등에서 보이며, 음각되거나 인각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마상배에 새겨져 있는 ‘어존’이라는 한글 명문은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무등산충효동가마터』(국립광주박물관, 1993)
- 「광주충효동고려도요지조사」(임천, 『고고미술』 25, 1962)
- 「광주고려시대도요지발굴조사-무등산금곡요지-」(최희순, 『업적보고서』 62·63, 동아문화연구위원회, 1962·1963)
- 「이조분청사기의 연구」(강경숙, 『이대사원』 5, 이화여자대학교사학과, 1964)
-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사, 2005)
-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국립광주박물관·광주직할시, 2003)
- 『조선시대 도자기』(김영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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