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충효동 요지 ( )

광주광역시 충효동 요지 전경
광주광역시 충효동 요지 전경
공예
유적
문화재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 백자 · 청자 등을 굽던 가마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광주 충효동 요지(光州 忠孝洞 窯址)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4년 08월 29일 지정)
소재지
광주 북구 금곡동 179-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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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 백자 · 청자 등을 굽던 가마터.
개설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무등산의 충효동 일대에는 14세기 말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다.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1963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특히 1991년의 발굴에서 7기의 가마유구와 3m에 달하는 퇴적구의 층위가 조사되어 15세기 분청사기 가마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분청사기가 변화·쇠퇴하여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밝힐 수 있는 근거와 편년기준을 알려 주었다.

내용

최초의 광주광역시 충효동 요지 조사는 1963년 6월 20일부터 7월 16일까지 약 1개월 간 계속되었다. 해당 발굴 조사 결과 충효동 요지는 그 중요성이 학계에 널리 인식되어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3년의 발굴은 가마 주변의 퇴적층 조사에 그치는 수준이었고 가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후속 조사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주관한 제2차 발굴이 실행되었다.

7기의 가마 중 2호 가마가 복원되어 현재 보호각 안에서 전시 중이다. 2호 가마는 총 길이 20.6m, 너비 1.3m 내외의 규모로서 서쪽 벽(아궁이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6곳의 측면 출입구가 있으며 13도의 경사면에 진흙과 돌로 축조하였고 전체 가마의 소성실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오직 하나로 구성된 ‘단실요’ 구조이다. 번조실 바닥은 진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으며, 측면 출입구가 있는 곳의 바닥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아궁이는 길이 1.7m, 너비 1.6m로 원형이고 번조실로 올라가는 불턱의 높이는 약 90㎝이며 진흙과 돌로 축조했다. 아궁이의 입구는 양쪽에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현재의 너비는 35㎝이다. 굴뚝 시설은 연기에 그을린 돌무더기로 인해 돌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연도로 생각되는 길이 60㎝, 너비 40㎝의 골이 있다.

충효동 가마의 활동시기는 『세종실록』「지리지」무진군조(茂珍郡條)의 “자기소 1 재군동 이점(磁器所 一 在郡東 梨岾)”이라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광산현 토산조의 “자기 현동 석보리(磁器 縣東 石保里)”라는 기록을 통해 1420년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 요업을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 유물은 분청사기가 대부분이며 그 다음으로 백자와 청자가 차지한다. 그 밖에 흑유, 토기, 요도구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가 주종을 이루고 합, 발, 호, 병, 매병, 제기, 마상배, 잔, 장군, 벼루, 주자 등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었다. 장식적으로는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에는 인화문이 가장 많고 병과 항아리에는 상감, 조화, 박지문양이 있으며,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귀얄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백자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는 태토의 강도가 연질과 경질로 뚜렷이 구분되며, 분청사기와 연질백자는 한 가마 안에서 함께 소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충효동 요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백자, 갑발 등 도자기와 요도구에서는 많은 명문들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인화분청의 경우 양질과 조질에 따라 명문의 내용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점이 주목된다. 양질의 분청사기에는 주로 굽 안바닥에 ‘金’, ‘朴金’, ‘李万’, ‘金咸’, ‘朴用’, ‘德金’ 등이 굽 안바닥에 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장인들의 성과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양질의 분청사기 가운데는 지명과 관청명이 백상감된‘茂珍內贍(무진내섬)’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질의 인화분청에는 장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正閏二(정윤이)’, ‘公別(공별)’, ‘光(광)’, ‘光公(광공)’, ‘光別(광별)’, ‘光上(광상)’ 등 날짜와 지명을 표시한 예가 많이 확인된다. 기명의 위치는 내저 중앙, 굽 안바닥 등에서 보이며, 음각되거나 인각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마상배에 새겨져 있는 ‘어존’이라는 한글 명문은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충효동 요지는 전라도 지역 분청사기의 성격과 백자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마다.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광주 충효동에서 제작된 도자기가 크게 6단계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단계는 분청사기와 적은 양의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모두 갑번에 의한 최고급품이 생산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루며, 외형상의 특징은 1호가마 출토품과 유사하나 제작수법이 거칠어지고 대접과 접시류는 포개어서 소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분청사기가 대부분이며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는 전 단계보다 크기가 작아지며 갑번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상감이나 박지기법은 급격히 줄어들고 조화기법이 이용된다. 백자는 모두 갑번에 의해 소성된다. 네 번째 단계는 분청사기 제작수법에 많은 변화가 확인된 시기이다. 굽이 두꺼워지고 문양이 간편하게 시문되는 경향이 보인다. 상감이나 박지분청사기는 발견되지 않으며 조화와 인화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룬다. 백자의 제작량이 전 단계보다 증가되며, 귀얄분청사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된다. 다섯 번째 단계는 귀얄분청사기가 증가하며, 인화분청사기는 제작수법이 더욱 거칠어지는 경향이 보인다. 여섯 번째 단계는 인화분청사기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으며, 귀얄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백자가 전 단계보다 크게 증가되어 전체의 37%를 차지하는데, 이는 충효동 요지가 백자생산 체제로 점차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무등산충효동가마터』(국립광주박물관, 1993)
「광주충효동고려도요지조사」(임천, 『고고미술』 25, 1962)
「광주고려시대도요지발굴조사-무등산금곡요지-」(최희순, 『업적보고서』 62·63, 동아문화연구위원회, 1962·1963)
「이조분청사기의 연구」(강경숙, 『이대사원』 5, 이화여자대학교사학과, 1964)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사, 2005)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국립광주박물관·광주직할시, 2003)
『조선시대 도자기』(김영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집필자
방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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