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 ( )

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 전경
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 전경
공예
유적
문화재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조선시대 생활백자를 굽던 가마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軍浦 山本洞 朝鮮白磁 窯址)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1년 01월 09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057-4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조선시대 생활백자를 굽던 가마터.
개설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군포시 산본2동 골안마을에 소재하는 조선백자요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대한주택공사의 산본지역택지개발 조성계획에 따른 구제발굴의 하나로 실시되었다. 이 요지는 발굴조사 전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유적으로, 명지대학교박물관이 1월∼3월에 걸친 군포산본지구문화유적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면서, 광주 이외 지역에 위치한 조선초기 지방백자요지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990년 발굴 당시 15세기 말∼16세기 전반에 운영된 가마가 확인되었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에 의해서 바로 인접해 있던 18세기 가마가 1993년에 발굴되었다. 15세기 말∼16세기 전반의 가마는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지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고, 18세기 가마는 굴뚝부만 지정 영역 안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내용

군포시 산본동에서 발굴된 가마는 사용시기의 선후관계에 따라 봉통부(굴뚝부분)만 남아 있는 구릉 위의 앞 시기 가마를 A가마라 하고, 거의 완벽한 유구가 노출된 남서지역의 뒷 시기 가마를 B가마라 정하였다.

A가마는 퇴적의 가장 정상부에 위치하여 퇴적의 유실이 심하고 이후 시기에 작업장이 이곳에 설치된 이유 때문인지, 가마에 관계된 유구로는 극히 일부분의 앞머리 부분 바닥면과 2기의 봉통부 뿐이고 가마벽등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된 2기의 봉통부는 축조 순서에 따라 A₁, A₂로 구분된다. B가마는 A가마 보다 뒷시기에 축조된 것은 틀림없으나, 이 가마의 굴뚝 뒷부분에서 나타난 가마중첩상황을 고려하면, A가마와 B가마 사이에 또 다른 가마가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B가마는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구지표면을 약 30㎝정도 파고 구축한 반지하식의 칸으로 나누어진 가마이다. 진흙을 이용해 가마벽을 쌓았는데, 벽두께는 약 5㎝로 앞의 3㎝가량이 유리질화 되어 있고 뒤쪽은 빨갛게 익어 있으며, 가마벽에는 사용전에 미리 백토를 귀얄에 묻혀 전체를 바른 듯, 귀얄자국이 뚜렷하다. 외벽의 두께는 약 30∼35㎝로 추정되며, 외벽축조상태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부 내벽에 잇대어 돌을 쌓아 보강한 흔적이 남아 있다.

봉통부는 돌과 진흙을 함께 사용하여 구축하였고, 가마바닥에는 고운 모래를 깔고 그 위에 도지미를 놓아 바닥의 수평을 잡은 뒤, 다시 개떡 위에 모래를 놓고 그릇을 얹어 구웠는데, 개떡들은 미세한 계단상을 이루고 있다.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의 B가마는 칸마다 불창구조의 기둥의 수가 다르게 설치되어 있으며, 가마의 전체 길이는 25m 정도일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 도편은 무문의 생활백자가 대부분이고 음각, 양각, 투각, 청화백자, 철화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이 약간 출토되었다.

특징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는 광주관요 이외의 지역에서 청화백자가 확인된 최초의 예로, B작업장 부근에서 3편이 확인되었다.

이 중 두 편은 기벽이 매우 얇고 정제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구연이 외반된 편에는 두 줄의 청화선이 있고 그 아래에 간략화된 보상당초문으로 보이는 문양대가 그려졌다. 청화의 발색은 암청색을 띠며 구륵법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밖에 동체부의 일부로 생각되는 파편은 너무 작아 확실치 않으나 역시 보상당초문 계통의 문양이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나중에 채색을 하는 구륵법으로 그렸으며 앞서 서술한 파편의 청화발색보다 진하지 않으며, 태색이 약간 푸른 색을 띠고 있다.

나머지 1편은 비교적 두꺼우며 대형의 구연부 파편으로 가마에서 소성할 때 여러 잡물들이 떨어져 많이 묻어 있다. 아마도 항아리의 구연부로 생각되는데, 곧게 세워져 끝나는 입부분과 이 짧은 구부(口部)와 동체와의 연결 지점에 각기 한 줄씩의 청화선이 그려졌고 그 아래에 파초 잎으로 보이는 문양이 약간 남아 있으며 곁에는 청화가 퍼지고 뭉쳐져 있다. 내면의 구부에도 문양대가 있으나 청화가 번져 알 수 없으며, 아래에도 청화가 번져 있다. 청화발색은 매우 밝고 경쾌한 느낌의 맑은 청색을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가마터가 가진 가장 큰 의의는 조선 전기에 사용된 가마의 소성실이 칸으로 나누어진 분실 가마 유구라는 점과 왕실용 백자 생산지가 아닌 지방에서 청화백자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가마 구조를 보면 동일 요지에서 시기와 방향과 위치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마유구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 외에 봉통부를 돌과 진흙을 섞어 축조한 점, 봉통 높이가 1m 이상 되는 점, 가마벽에 유약을 발라 보열 효과를 높인 점 등 조선 전기 가마구조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다고 하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두 개의 선후 관계가 뚜렷한 퇴적층이 조사되어 조선 전기 백자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가마터 주변에서 발굴조사 결과 밝혀진 청화백자의 존재는 실제 지방 가마에서 비록 소량이지만 청화백자를 어떻게 제작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청화백자는 고가의 안료 탓에 광주 관요에서만 화원들이 제작에 관여하였고 사용도 왕실이외에는 법적으로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따라서 산본동 가마터에서 발견된 청화백자는 누군가 비공식적으로 관요와 상관없이 제작을 의뢰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참고문헌

「조선시대분원의 성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1·2」(윤용이, 『고고미술』 149·150, 1981)
『산본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명지대학교박물관·호암미술관, 1990)
『문화재대관-사적』제1권(증보판)(문화재청, 2010)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사, 2005)
『산본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명지대학교박물관·호암미술관·경기도, 1990)
집필자
방병선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