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얄(풀비) 같은 넓고 굵은 붓으로 형체가 완성된 기면(器面) 위에 백토(白土)를 바르는 기법을 일컫는다.
귀얄기법은 사용하는 붓의 특성상 기면에 털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일반적인 백토 분장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런 연유로 일본 학자들이 쇄모목(刷毛目)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귀얄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다.
기면은 마치 캔버스처럼 귀얄붓이 지나간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나뉜다. 이를 초벌구이한 후 유약(釉藥)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구우면, 백토 색상을 그대로 드러낸 흰색 부분과, 태토의 검붉은 색상이 배경으로 남아 있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보이는 귀얄자국에서는 빠르고 힘찬 운동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어떠한 조형 계획이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제작자의 필치(筆致)와 붓의 흐름에 따른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따라서 전체 기면에서 차지하는 백토 면적의 비례나 백토의 윤곽선 등에서 조작과 꾸밈이 없어, 조선 전기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한 기법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일본인들 사이에도 귀얄기법을 사용한 분청사기가 다기(茶器)로 널리 애용되었는데 기형과 어울리는 자연적인 장식미가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귀얄기법은 분청사기에 사용된 여러 가지 장식기법 중에서도 상감(象嵌)이나 인화(印花) 기법 등과 비교할 때 시기적으로 비교적 나중에 사용된 기법이다. 즉 상감이나 인화 기법이 15세기 초반인 세종연간부터 유행했다면, 귀얄기법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인 성종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분청사기가 초창기 고려 청자의 장식기법에 보다 친연성(親緣性)을 보이는 조각적인 장식에 치중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붓을 사용하고 태토의 색상을 백자에 가까운 백색으로 치장하려는 대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 백자와 닮아가려는 적극적인 백토 사용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16세기 후반 자연히 분청사기의 소멸과 함께 이 기법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귀얄기법을 사용한 분청사기는 전국의 가마터에서 골고루 나온 편이나 그 중에서도 호남지방과 충청도 등지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