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에 개요(開窯)하여 조선 전기까지 운영되었던 가마터로, 본래 1963년 각각 사적으로 지정되어 성산사부동도요지(星山沙鳧洞陶窯址)와 성산기산동도요지(星山箕山洞陶窯址)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두 요지를 통합하고 사적으로 재지정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운영되었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의 사부동과 기산동에 위치한 가마터이다. 모두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입구 바로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하며, 가마터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주위를 정비하여 보존 중에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현재는 도편의 지표 수습은 거의 불가능하다. 두 요지간의 거리는 약 1km로 두 곳에서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대부분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 먼저 청자 가마터는 14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여기에서 만들어진 기형은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며 기벽(器壁)이 두껍고 굽이 투박하며 모래받침으로 번조(燔造)하였다. 유약은 반투명유로 두껍게 시유하였으며 유조는 암녹색을 띠고 있다. 문양 장식은 인화시문(印花施文)이 주를 이루고 거칠고 투박하게 시문되었으며, 국화판(菊花瓣), 운문(雲文), 와권문(渦卷文) 등이 많다.
조선시대의 가마터로 비정되는 곳에서는 인화문과 귀얄문 장식의 분청사기, 그 중에서도 상품(上品) 사기를 번조하던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가 있다. 시문방법으로는 인화, 귀얄, 분장, 음각기법 등이 보이며 인화기법은 대접 내저면의 국화문과 내측면의 파상문, 집단연권문이 주종을 이루며 분장기법은 드물다. 대접과 접시는 굽 안까지 시유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며 모래가 섞인 태토빚음받침을 사용하여 포개어 번조하였고 대발(大鉢)의 어문(魚文)과 같은 경우 음각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령지역은 조선시대에 우수한 도자기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조선 초 학자이자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지낸 성현(成俔, 1439∼1504)은 1504년 저술한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고령 백자의 우수성을 언급하였다.
또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역시 그의 문집 『점필재집(佔畢齋集)』과 『이준록(彛尊錄)』에서 고령 백자의 품질을 높게 평가하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서는 광주 이외에도 경상도 고령[縣 東 曳峴里]과 상주[中牟縣 北 秋縣里, 中牟縣 東 已未隈里, 攻城縣 西 院洞]의 상품자기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 최근의 사부리 도요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백자편은 1974년 국보로 지정된 진양군 영인정씨묘에서 발견된 백자상감초화문편병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 도요지 이외에도 고령 지역에는 성산면, 운수면, 우곡면 등지에서 10여 개소 이상에서 도요지가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도요지는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를 모두 제작했던 가마터로서 이미 광주에 분원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질 좋은 백자와 공납용 분청사기를 만들고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서는 고령의 자기소를 ‘상품(上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의 여러 문집에서도 고령의 사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분원이 생기기 이전 조선의 중요한 도자 제작지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