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호국신을 모신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주목 풍속조에 의하면, 광양당은 차귀당(遮歸堂)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 신당으로서 “매년 봄과 가을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고기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신당이었다.
무속의 구전에 의하면, 국당(國堂)의 하나로서 금자광록태광성(金紫光祿太匡星)·고산태오(高山太烏)·시님제석도[師僧帝釋]·서역국대부인(西域國大夫人)·감찰지방관(監察地方官) 등 5위의 신을 모셨던 신당이다.
또한, 광양당신(廣壤堂神)은 정의현(旌義縣: 과거 남제주군 표선면,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의 서낭당신, 대정현(大靜縣: 과거 남제주군 안덕면,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의 광정당신(廣靜堂神)과 한 형제로, 옛날 삼형제가 활을 쏘아 각기 차지할 곳을 정하였는데, 맏형인 광양당신이 제주목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탐라지(耽羅志)』에는 광양당을 ‘한라산호국신사(漢拏山護國神祠)’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유래담이 실려 있다. 광양당신은 한라산신의 아우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었고, 죽어서 신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송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제주도의 지맥을 끊고 돌아갈 때, 이 광양당신이 매[鷹]로 변하여 호종단이 탄 배 위를 도니, 갑자기 북풍이 크게 일어나자 배는 비양도(飛揚島)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 신의 영이(靈異)함을 칭송하여 식읍을 내려주고, 광양왕을 봉하여 해마다 향과 폐백을 내려 제사지내게 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광양당은 관민의 숭배대상이 되어오다가,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의 무불타파시책(巫佛打破施策)에 의하여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