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 세조의 즉위로 단종 이래 미약했던 왕권이 강화되고 신권(臣權)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세조의 재위 기간 거듭된 정변으로 공신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에 세조는 종친을 중용해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의 지속적인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종친 중용책과 함께 구성군은 침착하고 노성한 성품과 무예에 뛰어난 재질을 지녀 세조로부터 “문(文)에는 영순군(永順君)이고, 무(武)에는 구성군이다.”라는 촉망을 받으면서 중용되었다.
구성군은 1467년 함길·강원·평안·황해의 4도도총사로 이시애난(李施愛亂) 토벌을 총지휘했으며, 그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영의정이 되어 백관과 국정을 총괄했으며, 그 해 10월 남이옥사(南怡獄事)의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녹훈되어 그의 정치적 비중은 대단히 컸다.
1469년 예종이 즉위 1년만에 죽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세조 이래 원로 대신들도 이를 몹시 우려하였다. 또한, 섭정하고 있는 정희왕대비(貞熹王大妃 : 世祖妃尹氏)도 어린 성종을 보호하기 위해 종친의 배제가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때 1470년 생원 김윤생(金允生)과 별시위 윤경의(尹敬義)가 “전직장(前直長) 최세호(崔世豪)가 말하기를, ‘구성군은 담력과 지혜가 있으니 가히 왕이 될만한 인물이다.’라고 한다.”고 고변하였다.
또 영의정을 역임한 중망있는 종친인 구성군이 성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 대신·대간들은 집요하게 그를 논죄하였다. 이에 섭정인 윤왕대비가 마침내 영해부(寧海府)에 유배를 명함으로써 구성군은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그 뒤 그의 사면이 여러 차례 논의되었으나, 그의 영향력을 꺼려한 왕실과 조신들의 반대로 끝내 사면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한 것을 기회로 원로 대신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일어났다.
이로써 신권 견제를 위한 종친 중용은 종말을 고하고 이후 신권이 정치를 주도해나가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474년에 입법화된 《경국대전》에 종친사환금지(宗親仕宦禁止)를 규정해 종친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