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공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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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중기 의병의 군공(軍功)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던 임시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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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 의병의 군공(軍功)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던 임시관서.
내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무너지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군공을 세웠으므로 이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군공청사목(軍功廳事目)』에 의하면, 하층신분인 공천·사천도 적 1급을 참수하면 면천(免賤 : 천인을 면제하여 줌), 2급을 참수하면 우림위(羽林衛), 3급을 참수하면 허통(許通 : 양반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자격이 됨), 4급을 참수하면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하게 되어 있어 하층신분에서 상층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는 노비에게만 주어졌던 것인데, 인장을 위조한다든가 또는 군공청의 관리와 지방관원에게 뇌물을 주거나 정실 등이 개재되어 허위보고가 많아 공평한 논공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 군공수직(軍功授職 : 군사적인 공훈에 따라 벼슬을 줌)의 규정도 처음에는 일정하지 않아 그 적용에도 애매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제도가 생김으로써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층민에게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졌고, 실제로 천민으로서 양반신분이 되어 높은 관직이 제수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급한 전국(戰局)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구인데다 각종 부정이 따랐으므로 1603년(선조 36) 이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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