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임(士任), 호는 동산(東山). 아버지는 권약(權瀹)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의 딸이다.
어려서는 체격이 크고 기상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될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약 8년 동안 회덕·성주 등지로 피난다니다가 17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덕에 있을 때 이윤우(李潤雨)에게 학문의 도리를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다시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학문의 요체를 터득하였다. 그 뒤 별시(別試)에 나아가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진주의 서굴촌(西崛村)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성인의 유상(遺像)을 모셔놓고 잠명고훈(箴銘古訓)을 독송하며 분향묵좌(焚香默坐)로 수행하여 사람들이 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고 불렀다. 또한, 하동에 향약을 만들어 풍속교화에 힘썼다.
1627년(인조 5)에는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권극량은 시에도 능하였으며, 조위한(趙緯韓) 형제 등과 경의(經義)를 강론한 적이 있다. 두릉서원(杜陵書院)·완계서원(浣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산문집(東山文集)』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