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以). 공주 출신. 권전(權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권양(權讓), 아버지는 호조판서 권업,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다.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이 되고 이어서 시독관(侍讀官)을 거쳐 세자책봉사(世子冊封使)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1년 대사간에 오른 뒤 승지를 거쳐 1763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가 해남현감으로 출송되었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는데 구양수(歐陽修)의 말을 인용, 군주는 난언(難言)을 항시 들으려 해야 감추어진 사정(私情)을 없앨 수 있음을 간하고, 또 태묘축책(太廟祝冊: 종묘에 신위되는 것을 축하는 글)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다 파직당했다.
곧 승지로 기용되었다가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소를 올린 헌납 황최언(黃最彦)을 제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평해군수로 출송되었다. 176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거쳐 1771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순천의 세선(稅船)이 충청도 연안에 이르러 선원들이 민가를 약탈하자 조정에 보고해 이들을 모두 효수에 처하도록 했다. 이듬해 대사헌, 1776년 이조참판·예문관제학·관상감제조, 이듬해 한성판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78년(정조 2) 공조판서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예조판서·우참찬·병조판서·좌참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80년 치사(致仕)를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아직도 근력이 강장함을 들어 만약 이를 허락한다면 조정에 나이 많은 대신들이 모두 뒤따를 것을 우려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한성판윤·우참찬, 1782년 지경연사, 1788년 다시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