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립(公立), 호는 삼외재(三畏齋). 아버지는 권병직(權秉直)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 정동신(鄭東藎)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였으며, 15세에 이미 경사(經史)와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을 섭렵하였으며,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 들어간 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1902년 기정진(奇正鎭)의 문집이 간행될 때 이이(李珥)의 학설을 배척한 「외필(猥筆)」을 문제 삼아 이의 산삭(刪削)을 주장하는 한편, 그에 반박하는 논설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과 함께 고종을 만나려고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서 일본헌병에 의하여 고향으로 압송당하였다.
스승의 순절 후 진영(眞影)을 봉안하고서 조석으로 문안하는 등, 사제의 도리를 극진하게 실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극단적인 주관에 입각한 논지를 배격하고 절충적 입장에서 성리학의 연구에 전력하였으며, 망국의 회한을 읊은 시를 많이 지었다. 저서로는 『삼외재문집(三畏齋文集)』 21권 10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