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무동(武童)이란 별칭을 받았다. 약관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를 모으자 휘하에 들어가서 심복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워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인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당여들을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공으로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 세종의 아들)의 저택과 하위지(河緯地)의 처와 여식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1462년에 명나라 황태후가 죽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예로써 이름을 떨쳤으나, 입신을 위하여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