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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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태산집요 /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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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문자
개념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갑오개혁 이전까지의 국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갑오개혁 이전까지의 국어.
개설

근대국어는 중세국어에서 현대국어를 이어주는 교량적 시기의 국어이다. 근대국어 시기는 후기 중세국어의 변화된 결과가 나타나서 새로운 체계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동시에 현대국어의 제반 특징이 출현하는 때이기도 하다.그래서 근대국어는 중세국어와 현대국어 사이에서 공통점[相似]과 차이점[相異]이 보이는데, 중세국어와 근대국어, 현대국어와 근대국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보이고, 중세국어와 현대국어 사이에는 차이점이 나타난다.

내용

근대국어를 자료 · 표기 · 음운 · 문법 · 어휘의 측면에서 그 특징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자료

근대국어 자료는 중세와 달리, 초간 · 중간 · 복각본 등이 매우 다양하여 자료 취급에 주의하여야 한다. 또, 중세국어 자료보다는 각 부문에 걸쳐서 다양성을 보이는 반면, 문헌에 따라서는 지방에서 간행된 경우도 많아 방언적 요소를 확인해야 한다. 근대국어 자료에 한하여 초간 · 중간 · 복각본 등을 대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7세기에 최초로 간행된 초간본은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와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1608)가 있다. 그리고 『연병지남(練兵指南))』(1612) · 『동의보감(東醫寶鑑)』(1613) ·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1617) 등이 편찬 · 간행되었다. 이들은 앞의 의학서들과 함께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구례 화엄사(華嚴寺) 개간의 『권념요록(勸念要錄)』(1637)은 초간은 아니지만 17세기 초기 국어의 특징과 방언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도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1644) · 『어록해(語錄解)』(1657·1669) 등이 있고,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1670) ·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677) · 『첩해신어(捷解新語)』(1676) 등 역학서(譯學書)의 자료들이 있다. 중국어 어휘집인 『역어유해(譯語類解)』(1690)는 17세기 말엽의 중요한 자료이다. 『왜어유해(倭語類解)』는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의 자료로도 간주된다.

18세기에 들어 초반에는 『오륜전비기언해(伍倫全備記諺解)』(1721)로 중국어학습서와 『어제여사서언해(御製女四書諺解)』(1736) · 『성학십도(聖學十圖)』(1744) · 『어제상훈언해(御製常訓諺解)』(1745) · 『사서율곡언해(四書栗谷諺解)』(1749) 등이 간행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1755) · 『어제훈서언해(御製訓書諺解)』(1756) · 『성학집요(聖學輯要)』(1759) · 『행원품(行願品)』(1760) 등이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1757)을 비롯하여 약 30여 종의 윤음이 있다.

다음에 『어제백행원(御製百行源)』(1765) ·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1772) ·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1776) · 『명의록언해(明義錄諺解)』(1777) · 『속명의록언해)』(1778) · 『병학지남(兵學指南)』(1787) · 『무예도보통지언해(武藝圖譜通志諺解)』(1790) ·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1792), 그리고 말엽의『종덕신편언해(種德新編諺解)』 등이 있다.

18세기의 사역원(司譯院) 간행물은 만주어학과 몽고어학에 집중되었다. 『역어유해보편(譯語類解補篇)』(1775)과 『중간개수첩해신어(重刊改修捷解新語)』(1781)를 비롯하여 『팔세아(八歲兒)』 · 『소아론(小兒論)』 · 『삼역총해(三譯總解)』 ·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 등이 1703(숙종 29)에 간행되었다.

그런데 1765년(영조 41)에 『청어노걸대신석(淸語老乞大新釋)』, 1774년에 『중간삼역총해(重刊三譯總解)』, 그리고 1777년(정조 1) 『팔세아(八歲兒)』와 『소아론(小兒論)』이 간행되었는데, 오늘날 전하는 것은 이 개간본들뿐이다.

이보다 앞서 『동문유해(同文類解)』(1748)가 간행되었고, 영조 말 내지 정조 초에 『한청문감(漢淸文鑑)』이 간행되었으며,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1741·1766·1790) · 『첩해몽어(捷解蒙語)』(1737·1790) · 『몽어유해(蒙語類解)』(1768·1790) · 『몽어유해보편)』(1790) 등 많은 역학서들이 간행되고 개간되었다.

그 밖에 사본으로 전하는 다언어(多言語) 어휘집으로 『방언집석(方言集釋)』(일명 방언유석(方言類釋), 1778)과 『고금석림(古今釋林)』(1789)의 일편인 『삼학역어(三學譯語)』 등이 있다.

19세기의 자료는 대체로 후반기에 몰려 있다. 전반기의 자료는 『신간증보삼략직해(新刊增補三略直解)』(1805)와 『어제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御製諭中外大小民人等斥邪綸音)』(1839) 등을 들 수 있다.

후반기에는 『태상감응편도설언해(太上感應篇圖說諺解)』(1852) · 『관성제군명성경언해(關聖帝君明聖經諺解)』(1855) · 『규합총서(閨閤叢書)』(1869) · 『경신록언석(敬信錄諺釋)』(1880) · 『과화존신(過化存神)』(1880) · 『조군영적지(竈君靈蹟誌)』(1881) · 『척사윤음(斥邪綸音)』(1881) · 『어제팔도사도기로인민등윤음(御製八道四都耆老人民等綸音)』(1882) · 『삼성훈경(三聖訓經)』(1880) · 『불가일용집(佛家日用集)』(1882) · 『관성제군오륜경(關聖帝君五倫經)』(1884) · 『중정방약합편(重訂方藥合篇)』(1884) · 『잠상집요(蠶桑輯要)』(1886) 등이 있다.

그 밖에 필사본의 『천수경언해(千手經諺解)』(1889) · 『국한회화(國漢會話)』(1895)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학작품이 있다.

한자음 · 문자 · 음운 · 어휘에 대한 문헌으로는『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1747) · 『삼운성휘(三韻聲彙)』(1751) · 『규장전운(奎章全韻)』(1796) · 『경세정운(經世正韻)』(1678) ·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1750) · 『이제유고(頤齊遺藁)』 · 『언문지(諺文志)』(1824) · 『아언각비(雅言覺非)』(1819)등이 있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795)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등은 국어 및 문자 체계에 대한 흥미있는 관찰을 포함하고 있다.

이두에 관한 것으로는『고금석림(古今釋林)』 중의 『나려이두(羅麗吏讀)』와『전율통보(典律通補)』및『유서필지(儒胥必知)』 등을 들 수 있다.

  1. 표기

중세국어는 특히, 15세기에 국어 표기법이 비교적 완벽하게 정제된 데 비해, 근대국어의 표기법은 상당히 문란해졌다. 그 원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는 동안 상당수의 옛 문헌이 소실되어 많은 문헌을 새로 간행하게 되었고, 사설시조 · 가사 · 고전 소설 등 평민 문학의 대두로 문자 사용이 광범위하게 확대됨으로써, 비교적 제한된 사람들에 의하여 편찬된 문헌에 나타나던 엄격한 15세기 표기법이 문란해졌다.

둘째, 15세기 표기법의 전통을 지킬 수 없을 만큼 근대국어가 변화되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이 그러한 전통과의 단절을 더욱 촉진시켰다.

셋째, 근대국어가 겪었던 음운변화에 대하여 그 변화를 반영하는 표기가 정제되지 못하여 여러 가지 혼란된 문자체계가 무질서하게 사용되었다.

근대국어 표기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일부 문헌에 방점이 폐기되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방점 폐기가 일반화 되었다. ‘ㆁ’이 이미 16세기에 종성에 국한하여 쓰이거나 ‘ㅇ’과 혼동되어 쓰였으나, 근대국어에서는 완전히 ‘ㅇ’에 합류되었다. 그리하여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ㅇ’은 위치에 따라 음가가 달라지며, 음절 첫소리에서는 음가가 없고, 받침에서는 [ŋ] 소리가 난다.

‘ㅿ’도 ‘ㆁ’과 더불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ㅿ’자도 ‘ㆁ’과 마찬가지로 ᄆᆞᅀᆞᆯ(鄕), 나ᅀᆞ명(進), 뵈ᅀᆞᆸ고(謁) 등에서와 같이 근대국어의 일부 단어에 쓰였지만, 실제로 ‘ㅿ’이 없는 단어 형식이 더 많이 쓰였다.

중세국어의 합용병서는 ‘ㅅ’계의 ‘ㅺ · ㅼ · ㅽ’, ‘ㅂ’계의 ‘ㅳ · ㅄ · ㅶ · ㅷ’, ‘ㅄ’계의 ‘ㅴ · ㅵ’ 등 세 가지가 있었는데, 이들 중 ‘ㅴ · ㅵ’이 17세기에 각각 ‘ㅺ’ · ‘ㅲ’ 및 ‘ㅼ’ · ‘ㅳ’과 혼동 표기 되었다.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도 서로 혼란스럽게 쓰였다. 이러한 근대국어의 혼동표기는 18세기에 이르면 더욱 심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복잡했던 된소리 표기가 모두 ‘된시옷’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15세기 국어에서는 종성에서 ‘ㅅ’과 ‘ㄷ’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쓰이던 것이 16세기에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거의 무분별하게 쓰이게 되었다[예: 굳고/굳거든⇒굿거든(固), 맛/맏(味), 못/몯(池)]. 이러한 ‘ㄷ’과 ‘ㅅ’의 혼란 표기는 18세기에서는 ‘ㄷ’이 점차 없어지고 ‘ㅅ’으로 통일되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국어에서‘진실로(眞實), 블러(呼), 흘러(流)’와 같이 모음 사이에서 ‘ㄹㄹ’로 표기되던 것들이 ‘진실노(眞實), 블너(呼), 흘너(流)’와 같이 ‘ㄹㄴ’으로도 표기되어 혼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끝자음이 된소리나 유기음인 경우, 그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그 대표소리를 나타내는 자음을 한 번 더 표기하는 중철표기가 확대되어 나타났다. ‘깃ᄭᅥ(悅)’, ‘무릅피’, ‘곧ᄎᆞᆯ(花)’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각각 어간 ‘기ᇧ-’, ‘무릎’, ‘곷’ 등의 끝자음이 두 음절에 걸쳐 표기된 것이다.

또한 명사의 어간과 조사를 분철(分綴)하여 표기하는 분철표기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후반부터 이미 나타난 것이지만, 17세기 이후의 문헌 특히 『박통사언해』와 『명의록언해』 등에서 뚜렷하다. 이와 같은 분철표기는 명사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동사나 형용사의 분철표기는 다음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문법요소에 대한 인식이 체언과 조사의 분간에서 용언 어간과 어미의 분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 음운

근대국어의 자음체계는 중세국어 후기의 자음체계와 같으나, 유성마찰음 계열의 ‘ㅸ, ㅿ, ㆁ’이 사라지고 ‘ㅈ’의 된소리가 추가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5세기에 ‘ᅘᅧ-’(燃, 引)가 17세기에 ‘ᄻᅧ-’로 나타나 근대국어에 ‘ㅎ’의 된소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ᄻᅠ’은 17세기 후반에 ‘ㅋ’으로 합류되었다. 중세국어에서 어중에만 나타나던 ‘ㅈ’의 된소리(마ᄍᆞᄫᅵ, 연ᄍᆞᆸ고 등)는 17세기에 어두에서 ‘ㅾ’, ‘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중세국어 어두자음군이 된소리로 변한 사실과 관련된다.

15세기 국어의 유성마찰음 계열의 ‘ㅸ · ㅿ · ㆁ’에서 ‘ㅸ’이 1450년대까지 존속하다가 ‘w’로 변화되었고, ‘ㅿ’이 16세기 중엽에 소멸되었으며, 극히 제한된 위치에만 존재했던 ‘ㆁ’ 역시 16세기 중엽 이후에 소멸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근대국어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되었다.

  1. 근대국어 자음체계

ㅂ ㄷ ㄱ ㅈ ㅅ ㅎ

ㅍ ㅌ ㅋ ㅊ

ㅽ ㅼ ㅺ ㅾ ㅆ ᄻᅠ

ㅁ ㄴ ㅇ

모음 ‘ · ’는 16세기에 비어두음절에서의 제1단계 소실, 18세기에 어두음절에서의 제2단계 소실을 거쳐 국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 · ’의 소실은 국어의 단어나 문법요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것은 ‘ㆍ’를 가지고 있었던 어휘들과 문법형태소들이 모두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제1음절에 ‘ㆍ’를 가지고 있었던 어휘는 ‘ㅏ’로 대치되고, ‘ㆎ’의 그것들은 ‘ㅐ’로 대치되었다. 또 문법형태소 중에서 ‘ᄋᆞᆯ/ᄅᆞᆯ, ᄋᆞᆫ/ᄂᆞᆫ, ᄋᆡ, ᄋᆞ로, ᄋᆞ나’ 등이 제1단계 소실에서 ‘ · >ㅡ’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던 ‘을/를, 은/는, 의, 으로, 으나’ 등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근대국어에서 일어난 모음변화에서 주목할 것은 ‘ㅡ’의 변화인데, 그 하나가 ‘ㅡ>ㅜ’이다. 흔히 원순모음화(圓脣母音化)로 불리는 이 모음변화는 양순음 ‘ㅁ, ㅂ, ㅍ, ㅽ’ 아래에서 모음 ‘ㅡ’가 ‘ㅜ’로 변한 것을 말한다. 이 변화로 중세국어에서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었던 음절 ‘므, 브, 프, ᄲᅳ’와 ‘무, 부, 푸, ᄲᅮ’ 등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양순음 아래에서 일어난 ‘ㅡ’모음의 변화와 동일하게 선행하는 자음의 영향으로 일어난 모음의 변화가 또 있다. 곧, 치찰음(齒擦音) ‘ㅅ, ㅈ, ㅊ’ 아래에서 ‘ㅡ’가 ‘ㅣ’로 변한 사실이 그것인데, 이러한 변화는 19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국어의 ‘아ᄎᆞᆷ’(朝)은 16세기에 ‘ㆍᆞ>ㅡ’의 변화에 따라 ‘아츰’이 되고 19세기에 ‘ㅡ>ㅣ’의 변화로 현대국어와 같이 ‘아침’이 되었다.

이미 중세국어 말기에 ‘불휘’(根)의 ‘휘’가 『소학언해』에서 ‘ᄂᆞᄆᆞᆯ ᄲᅮᆯ희’(六, 133)의 ‘희’와 같이 변하여 ‘ㅟ’가 ‘ㅢ’로 변한 예를 찾아볼 수 있으나, 이런 변화 경향은 17세기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ㅟ’가 ‘ㅢ’로 된 뒤에 근대국어에서 다시 ‘ㅢ>ㅣ’의 변화가 일어났다. ‘믭-(憎)’>‘밉-’, ‘불희’(根)>‘ᄲᅮ리’ 등이 그 예들이다.

중세국어의 이중모음 ‘ㆎᆡ[ʌi], ㅐ[ai], ㅔ[əi]’ 등은 근대국어에서 단모음으로 변하여 각각 음가 [ɛ], [e]를 갖게 되었다. 이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는 움라우트 현상으로 입증되는데, 이는 결국 중세국어에서 단모음 ‘ㆍᆞ, ㅏ, ㅓ’를 가지고 있던 단어들이 후행하는 ‘ㅣ’ 모음에 의해 각각 ‘ㆎᆡ, ㅐ, ㅔ’로 교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근대국어의 모음체계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

  1. 근대국어의 모음체계

ㅣ(i) ㅡ(ɨ) ㅜ(u)

ㅔ(e) ㅓ(ə) ㅗ(o)

ㅐ(ɛ) ㅏ(a)

근대국어에서 가장 현저한 자음변화(음운변화)의 하나가 구개음화이다. 모음 ‘ㅣ’나 반모음(y) 앞에서 ‘ㄷ, ㅌ, ㄸ’이나 ‘ㄱ, ㅋ, ㄲ’이 ‘ㅈ, ㅊ, ㅉ’으로 변하는 현상이 국어사에서 전형적인 구개음화인데, 이런 자음변화는 남부방언(경상도, 전라도 방언)에서 매우 일찍 일어나 북상한 것이다.

근대국어 시기의 구개음화는 17세기와 18세기의 교체기(交替期)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구개음화로 중세국어에서 대립을 이루었던 ‘디:지, 댜:쟈, 뎌:져, 됴:죠, 듀:쥬’ 및 ‘티:치, 탸:챠, 텨:쳐, 툐:쵸, 튜:츄’ 등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구개음화는 ‘ㅅ’이나 ‘ㄴ’도 구개음화하며 [ʃ], [ɲ]와 같은 변이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 모음 ‘ㅣ’나 반모음 ‘y’ 앞에서 ‘ㄴ’이 탈락되는 근대국어의 특징은 구개음화와 관련된 음운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미 후기 중세국어 많이 나타난 평음의 경음화 및 유기음화는 근대국어에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후기 중세국어 ‘슷-(拭) 듧-(鑽) 곶-(揷)’ 등은 근대국어의 된소리화에 따라 ‘쓷-(씃-, ᄡᅳᆺ-)’(拭), ‘ᄯᅮᆯ-(ᄣᅮᆯ-, ᄠᅮᆯ-, ᄠᅮᆲ-, ᄯᅮᆺ-)’(鑽), ‘ᄭᅩᆺ-’(揷)의 예들처럼 된소리로 바뀌었다. 또한 후기 중세국어에서 ‘닷’(故), ‘불무’(冶), ‘고키리’(象) 등이 유기음화에 따라 각각 ‘탓, 플무, 코키리’로 바뀌었다.

근대국어 자료의 몇몇의 예에서 양순음의 유기음 ‘ㅍ’ 앞에서 ‘ㄹ’이 탈락된 것이 발견된다. 중세국어의 ‘앒(前), 알ᄑᆞ-(痛), 골ᄑᆞ-(飢)’ 등이 근대국어에서 ‘아ᄑᆡ(前), 압희(前), 아프게ᄒᆞ다(痛)’ 등으로 나타난 ‘앞-, 아프-, 고프-’ 등이 그 예이다.

한편, 중세국어의 몇몇 어휘에 근대국어 시기에 자음이 첨가된 예들이 있다. 15세기의 ‘ᄀᆞ초-’(藏)는 16세기에 ‘ㄴ’이 첨가된 ‘ᄀᆞᆫ초-’(七大七, 野雲, 67)가 나타나는 한편, ‘ㅁ’이 첨가된 어형인 ‘ᄀᆞᆷ초아, ᄀᆞᆷ촌’이 나타났다. 근대국어에서는 후자로 단일화가 일어났는데, 『역어유해』, 『동문유해』의 ‘ᄀᆞᆷ초다’가 그 예이다. 근대국어의 ‘근처’(斷)는 중세국어 후기의 ‘그치-’에 ‘ㄴ’이 첨가된 예라 하겠다. 중세국어의 ‘더디-’(投)도 구개음화로 ‘더지-’가 되고 다시 첨가자음의 발달로 근대국어에서 ‘던지-’가 되었다.

  1. 문법

근대국어의 문법체계는 중세국어보다 대체로 간소화되었다. 이 간소화의 경향은 근대어 문법의 거의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동사에서 명사를 파생시키는 어미로는 ‘-(으)ㅁ’이 대표적이었다. 중세어에서 동명사 어미 ‘-오/우-ㅁ’과 동사 파생명사와 구별되던 것이 근대어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한편 접미사 ‘-이’는 아주 비생산적으로 되어 일부만 화석화로 남아 있게 되었다.

형용사에서 파생된 ‘킈’ · ‘노ᄑᆡ’ · ‘기릐’ 등은 17~18세기에는 그대로였으나, ‘ㅢ>ㅣ’의 변화로 ‘키’ · ‘노피’ · ‘기리’가 되었다.

서수사의 경우 중세국어의 접미사 ‘-자히, -잣, 차히, -찻’ 등이 근대국어에서 ‘-재’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용언 어간이나 어근에 사동 파생 접미사 ‘-히-,-기-, -이-, -리-, -오(우)-, -구-’ 등이 접미되어 사동사 어간을 형성하였다.

중세국어에서 동사어간 ‘살-’(生), ‘돌-’(廻), ‘일-’(成) 등 ‘ㄹ’ 어간 말음을 가지고 있는 동사어간들은 접미사 ‘-이-’, ‘-우-’와 함께 ‘살이-, 일우-’를 형성하는 예와 더불어 특수한 접미사 ‘-ᄋᆞ-’에 의한 파생 사동 어간 ‘사ᄅᆞ-, 이ᄅᆞ-’ 등이 있었으나, 근대국어에서는 더 이상 파생 사동사 어간을 형성하지 못하고 ‘살오-, 일오(우)-’만 남게 되었다.

피동사 어간을 형성하는 피동접미사로는 ‘-이-, -히-, -리-, -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와 ‘-히-’가 가장 생산적이었다.

중세어에서 ‘-ᄅᆞᇦ/ᄅᆞᄫᆡ-’, ‘-ᄃᆞᇦ/ᄃᆞᄫᆡ-’ 등으로 나타난 명사로부터의 형용사 파생 접미사는 근대어에서 ‘-로ᇦ-’, ‘-되-’로 변하였고, 18세기에는 ‘-스러ᇦ-’이 출현하였다. 동사 어간으로부터의 ‘-ㅸ-’, ‘ᄇᆞ/브-’에 의한 파생법은 생산성을 잃었다.

중세국어 시기에 곡용할 때 나타나는 ‘ㅎ’말음을 가지고 있는 명사 어간이 있었는데, 그 ‘ㅎ’말음 명사들은 근대국어 전기에는 그 말음 ‘ㅎ’을 유지했으나, 후기에는 그것이 탈락하여 더 이상 자동적 교체를 가지는 명사가 되지 못했다. 근대국어 후기에 와서 ‘나모’ · ‘구무’ · ‘노루’ · ‘아우’ 등의 단일형이 주로 쓰였다.

주격 ‘-가’는근대국어의 조사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된다. 이미 16세기에 구어(口語)에서 보인 바 있지만, 17세기 문헌들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첩해신어』를 비롯하여 『신전자초방』에서 ‘y’를 가진 이중모음 뒤라는 일정한 환경에만 나타나며 발달의 초기 모습을 드러냈다. 18세기 후기 윤음언해에는 ‘i’모음계에 후행한다는 제약조건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쓰였다. 또한 존칭을 표시하는 새로운 조사들인 ‘ᄭᅴ셔’, ‘겨오셔’가 생겨났고, 17세기의 ‘-도곤’ 대신 18세기에 ‘-보다가’가 교체형으로 쓰였다.

그리고 중세어에서 다양한 교체를 보인 존재의 동사 ‘이시-, 잇-, 시-’는 근대국어에서 거의 ‘잇-’으로 단일화되었다. 선어말어미(先語末語尾)와 관련된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는 근대에 와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경어법은 존경법 · 겸양법 · 공손법의 체계에서 겸양법이 공손법에 합류되어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시상의 체계는 과거를 나타내는 ‘-앗/엇-’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미래의 ‘-겟-’은 근대에 발달된 듯하다. 현재 시상의 선어말어미 ‘-ᄂᆞ-’를 포함한 ‘-ᄂᆞ다’는 근대어에 와서 모음 어간 뒤에서는 ‘-ㄴ다’로, 자음 어간 뒤에서는 ‘-는다’로 변하였다. 또한 ‘-리-’가 통합되어 있는 어미구조체 ‘-리로다’와 ‘-리러-’ 등이 각각 ‘-ㄹ로다’, ‘-로다’, ‘-ㄹ다’, ‘-ㄹ러-’로 바뀐 형태변화가 일어났다. 동명사어미는 ‘-ㄴ’, ‘-ㄹ’, ‘-ㅁ’, ‘-기’ 등이 있었지만, ‘-기’ 동명사가 매우 많이 나타난다.

근대국어의 부동사어미는 간소화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즉, 선어말어미나 후치사, 첨사들과의 결합관계가 간소화되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어미들이 없어졌다. 그리고 설명법 어미 ‘-롸’ 의 출현, 중세어의 ‘-더이다’, ‘-ᄂᆞ이다’, ‘-노이다’, ‘-노소이다’, ‘-도소이다’ 등에서 ‘-다’가 탈락한 ‘-데’, ‘-ᄂᆡ’, ‘-뇌’, ‘-노쇠’, ‘-도쇠’ 등의 특수한 종결어미들이 외국어교본에 나타나고 있어 이 시기의 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1. 어휘

근대국어의 어휘는 그 변천과정에서 소멸 · 생성 · 차용의 모든 단계를 거쳤다. 먼저 구개음화, 움라우트(umlaut), 원순모음화 등 여러 가지 음운변화나 유추현상으로 인해 체언어간이나 용언어간의 재구조화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또한, 순수한 국어 어휘들이 없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한자어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새로운 어휘들이 추가되었으니, 대개 천문 · 지리 · 종교 등에 관한 어휘들이 수입되었다. 즉, ‘자명종(自鳴鍾)’ · ‘천리경(千里鏡)’ · ‘담배[煙草]’ 등이 그 예이다.

고유어 어휘의 의미 변화를 보면, 중세어에서는 ‘어엿브-’는 ‘불쌍하고 가련함’[憐憫] 정도를 의미했었는데, 근대국어에서는 ‘아름답고 곱다’[美麗] 정도의 의미로 바뀌었고, ‘어리-(愚)’는 ‘어리석다’의 의미에서 현대국어와 같은 의미로 바뀌었다. 또한 중세국어에서 ‘사랑ᄒᆞ-’는 ‘思’와 ‘愛’ 두 뜻이 있었는데, 근대국어에서는 ‘愛’만 남았다.

중세국어에서 ‘빋’은 현대국어의 ‘값’과 ‘빚’의 두 뜻을 가졌는데, 근대국어에 와서 ‘값’의 뜻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빋ᄊᆞ다’의 ‘ᄊᆞ다’는 본래 ‘그만한 값이 있음(値)’을 뜻했는데, 현대어에 와서 ‘비싸다’는 ‘고가(高價)’를 의미하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 · 문화적 교류에 의한 차용어(借用語)는 중국어 · 몽고어 · 만주어에 걸쳐 많이 유입되었다. 특히 19세기 말엽에는 일본어의 영향으로 일본의 한자어가 수입되었는데, 이것은 현대국어의 어휘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근대국어는 현대국어로 전환되는 데 필요한 제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국어에 나타나는 언어적 특징이 다양하고, 또한 체계의 변화도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과도기적 관점보다 하나의 독립된 연구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타당하며, 국어사연구의 맥락을 잇는 가치적 측면에서 근대국어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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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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