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주 시내에 있는 고분 가운데 지금까지 6점의 금관이 출토되었다. 물론 앞으로 좀 더 많은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지금보다 많은 수의 금관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렇게 금관이 발견된 무덤은 대체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이 시기에 해당되는 신라왕은 눌지마립간,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지증왕 등 4명이지만 출토된 금관의 숫자가 이보다 많은 점은 바로 금관이 왕을 포함한 왕비나 가족 등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황남대총의 금관이다.
황남대총의 북분은 ‘婦人帶(부인대)’라는 명문을 지닌 금제 허리띠를 통해 여성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며 남분인 왕의 무덤에서는 오히려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또한 금령총은 15세를 전후한 아이의 무덤인데도 화려한 금관과 매우 많은 금제 장식품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관은 재질에 따라 금관, 금동관, 은관, 동관으로 나누어지는데 은관은 초기에, 동관은 말기에만 일부 나타나는 점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신라 전성기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관임을 알 수 있다. 금관은 관의 제일 아래쪽에 관테[臺輪]가 원형으로 돌려있고 그 위에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사슴뿔 모양[鹿角形] 장식을 덧붙여 세우는 것이 신라관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금관의 장식들은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체로서의 나무와 사슴을 상징화한 것으로서 그 기원이 북방 유목민족의 샤먼들이 착용하던 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외래적 요소로 파악되고 있다. 아울러 금관은 태아를 상징하는 굽은 옥과 열매를 상징하는 달개가 달려 있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여러 겹의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된 고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왕과 왕비의 둥근 무덤이 서로 잇대어져 있는 쌍분의 구조로서 길이는 120여 m에 달한다. 그중 왕의 무덤에서는 금동판을 오려서 만든 관이 5점 출토되었고,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北墳]에서는 주검의 머리 부분에 씌워진 원형 그대로 금관이 출토되었다. 왕비의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出(출)’자 모양 세움 장식을 갖춘 금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파악된다.
3개의 나뭇가지모양[樹枝形] 장식과 2개의 사슴뿔[鹿角] 장식을 관테의 안쪽에 덧대어 3개의 금못을 ‘∴’ 모양으로 박아서 고정시켜 세웠다. 관테에는 위 아래쪽으로 2줄의 연속된 점무늬[點列紋]로 구획한 뒤 그 사이마다 1줄의 파도모양 무늬[波狀紋]를 역시 점무늬로 시문하였다. 이 구획 사이의 관테 중단부를 돌아가며 볼록하게 원형문을 일렬로 타출시킨 후 그 중앙마다 구멍을 뚫어 곱은옥[曲玉]을 금줄에 묶어 1점씩 매달았다.
세움장식의 작은 나뭇가지는 3단(段)이며 각 세움 장식의 외곽부를 돌아가며 안에서 바깥으로 돌출시킨 점열문(點列文)이 장식되었다. 관테와 마찬가지로 원형 돌기부를 타출시킨 후 그 중앙부에 비취제 경옥(硬玉)을 각 단마다 5개씩 매달아 화려함을 더하였다. 관테의 앞면에는 모두 6개의 굵은고리 귀걸이로 연결된 긴 수하식이 드리워져 있는데. 양 쪽 끝 수하식이 가장 길고 4개의 짧은 편이다. 바깥쪽 4개의 수하식의 끝부분이 금판으로 장식된 반면 안쪽 2개의 수하식 끝단에는 짙은 녹색의 곱은 옥이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