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신촌리 금동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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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신촌리 금동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
공예
유물
문화재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금동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나주 신촌리 금동관(羅州 新村里 金銅冠)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97년 09월 22일 지정)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고분로 747 (반남면, 국립나주박물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의 금동관이다. 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백제의 공주 도읍 시기에 영산강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묘에서 출토되었다. 수리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관의 관테는 너비 3㎝의 길죽한 금동판을 휘어서 모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풀꽃 모양 세움장식 3개를 별도로 만들어 안쪽에 고정하였다. 이 금동관은 현존하는 백제 관 중에서 내관과 외관이 결합된 유일한 예이다. 금도금한 구리판을 오리고 붙여 화려하게 꾸민 수작이다.

목차
정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금동관.
개설

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하고 있던 시기에 영산강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묘(首長墓)인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현존하는 백제 관 중 모관과 대관이 결합된 유일한 예로서 금도금한 구리판을 오리고 붙여 화려하게 꾸민 수작이다.

외관의 관테는 너비 3㎝의 길죽한 금동판을 휘어서 만들었고, 풀이나 꽃모양 세움장식[立飾] 3개를 별도로 만들어 안쪽에 덧댄 다음 못으로 고정하였다. 세움장식은 넓은 줄기의 가운데에 2개의 길쭉한 세로 홈을 뚫어 줄기가 3가닥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고 꼭대기에 넓은 보주형(寶珠形)의 장식이 표현되었다. 줄기의 맨 꼭대기와 좌우 곁가지의 맨 끝에 남색과 하늘색의 구슬을 홈에 끼워 넣어 붉은 기를 머금은 노란색의 관과 잘 조화시켰고, 그 외에 관테의 윗부분과 세움 장식에 둥근 달개를 많이 매달아 화려함을 더하였다. 관모는 반타원형 금동판 2장을 접합한 다음 가장자리에 좁고 길쭉한 판으로 덮어씌운 뒤 못으로 고정하여 고깔 모양의 관을 만들었다. 양측 판에는 상하로 작은 점을 연속으로 찍어 인동 무늬를 새겼으며 아래쪽 테두리에는 같은 기법으로 파도무늬가 표현되었다.

내용

백제의 관과 관식은 복식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고이왕조(古爾王條)와 『삼국사기』 잡기 색복조(雜記 色服條)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백제의 금동모관은 전라남도 나주 신촌리 출토 관을 제외한 모든 관이 한성(漢城)도읍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것으로 편년된다. 백제의 관은 좌우 측판(側板)을 U자형 복륜(覆輪)이 감싸고 있는 형태의 금동 모관(帽冠)이다. 측판의 아래를 대륜이 감싸고 측판의 앞, 뒤로 입식(立飾)이 결합되어 있으며, 복륜부에 대롱과 수발이 달려 있는 형태가 기본형이다. 현존하는 9점의 백제 관 중 7점은 이러한 모관의 형태이다. 신라의 금관은 둥근 테두리로 된 대륜 위에 수지형(樹枝形)이나 녹각형(鹿角形)입식이 결합된 형태가 특징적인데, 이러한 형태를 지닌 백제의 관이 바로 입점리 고분과 신촌리 9호분 출토품이다. 그러나 백제의 관은 모관이 중심이었고 이와 같은 신라관 형태는 지역성을 지닌 관모로 추정된다.

이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는데, 당시 출토된 이 관은 9점의 백제 관 중 가장 먼저 소개되었으나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편년된다. 조사 당시 두 관이 동반 출토되었으나 내·외관으로 함께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관은 좌우 측판의 형태와 세부 문양이 거의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촌리 관의 경우, 좌우 측판의 문양 구성은 동일하지만 세부 표현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측판의 문양은 중앙에 활짝 핀 연꽃이 시문되었고 그 아래에 3개의 봉오리가 표현되었다. 연화문 주변으로 간략화된 팔메트 문양과 관의 가장자리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었다. 이러한 연화와 팔메트 문양은 무령왕릉 왕비 관식에서도 확인된다.

좌우 측판의 문양을 비교했을 때 좌측판보다는 우측판의 문양이 상대적으로 크고 섬세하게 시문된 느낌을 준다. 문양 표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점선조만을 이용하여 문양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신촌리 관보다 앞선 예의 백제 모관의 경우, 투조를 주 표현 기법으로 채택하여 용이나 봉황, 식물문 등의 문양이 표현되었고, 보조 기법으로 선조를 채택해 문양의 세부가 표현되었으나, 신촌리 관에서는 다른 기법은 전혀 없이 점선조를 이용해 모든 문양이 표현되었다.

대관은 대륜 위에 수지형 입식 3개가 결합된 형태로서, 파손된 상태로 출토된 편을 통해 대관으로 추정하고 있는 익산 입점리 출토품을 제외하면 백제의 관 중 유일하게 수지형 대관 형식을 따르고 있는 관이다. 수지형 입식은 좌우대칭이며, 중앙 상단은 보주형 꽃봉오리가 표현되었다. 중앙의 보주형 장식 안쪽에는 타출의 점열문으로 연화문이 배치되었고, 중앙의 보주형 장식 양 옆으로 거의 동일한 형태의 보주형 장식이 비스듬하게 표현되었다. 보주형 장식 아래로는 3단으로 가지장식이 뻗어 있는데, 보주 장식 바로 아래에 있는 가지가 다른 두 가지보다 작게 표현되었다. 보주형 봉오리 중앙 최상단에는 구슬장식이 가미되어 있고, 입식에 전체적으로 보요장식이 달려있다. 모든 입식의 가장자리에는 타출의 점열문이 둘러져 있는데, 이 타출된 점열문은 대륜의 상하 가장자리에서도 확인된다. 수지형 입식의 상단에 보주형 장식이 달린 모양은 동시기 신라와 가야의 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다만 신라 대관의 수지형 입식은 가지모양이 ‘出’자 형으로 거의 동일한 형태를 띄고 있는 반면, 신촌리 관의 수지형 입식은 세 겹의 중앙 줄기를 두고 가지가 좌우로 뻗어 나가는 형태이다. 이러한 가지 형식은 신라보다는 오히려 가야관과 더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동일한 형태는 아니다. 또한 이 관이 백제의 관 중 대관의 유일한 예이기 때문에 입식 표현의 모티브를 어디서 차용했는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가지 끝 보주의 모양 또한 신라, 가야의 관에 달린 입식에서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문화적 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신촌리 관 이후 부여 하황리 고분, 논산 육곡리 7호분 출토품 등으로 대표되는 6∼7세기의 은화 관식의 화뢰에서 보주형 장식이 확인된다.

백제의 관 문화는 일본에까지 전해져 구마모토[熊本]의 에다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후쿠이현[福井縣] 쥬젠노모리 고분[十善の森古墳]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백제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쥬젠노모리 고분 출토품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어 원형이 분명치 않지만 신촌리의 것과 같이 대관과 모관이 결합된 상태의 것으로 확인되며 신촌리 대관의 장식과 유사한 구슬장식이 함께 출토되어 주목된다.

참고문헌

『공예』Ⅰ-고분미술(이한상, 예경, 2006)
『고대 동아시아 문명교루사의 빛, 무녕왕릉』(권오영, 돌베게, 2005)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솔출판사, 2005)
『고분미술』Ⅰ·Ⅱ(이영훈·신광섭, 솔출판사, 2003)
『특별전 백제』(국립중앙박물관, 통천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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