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1960년대까지 일본 대자이부(大宰府) 스죠인(水城院)에 소장되어 오다가 이후 스죠인이 없어지면서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9년 11월 일본인 소장가가 국내로 기증함에 따라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의 용뉴와 음통은 남아있지 않지만 높이 71.7cm, 구경 50cm의 중형 종으로 판단된다. 원래부터 명문은 없으나 세부 문양과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 등 고려 초 범종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고려 11세기를 넘어서지 않는 시기의 제작으로 판단된다.
종신은 기타의 고려 종에 비해 세장한 편으로서 용두는 부러져 한쪽 다리만 남아있으며 그 위로는 어느 시기인가 종을 걸기 위해 철 고리를 부착시켰다. 천판의 외연에는 간엽(間葉)이 첨가되고 연판 안에 화려한 문양이 시문된 연화문을 낮게 부조하여 주회시켰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그 문양이 서로 달라 상대에는 반원형의 문양을 연속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의 여백 면에는 반대 방향으로 마주보게 된 능형의 화문을 장식하였다. 반면에 하대에는 조밀하게 장식된 넝쿨형의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상대 아래의 네 방향에 있는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하대와 동일한 당초문으로 장식되었고 연곽 내부에는 연화좌 위에 높게 돌기된 연뢰(蓮蕾)를 9개씩 배치하였는데 일부는 부러져 있다. 종신 앞, 뒷면 두곳에 연화문과 그 주위를 당초문으로 두른 원형의 당좌를 두고 이 당좌를 중심으로 좌, 우면에는 천의를 날리며 구름 위에 앉아 합장한 모습의 공양비천상을 서로 마주보도록 고부조(高浮彫)하였다. 이 공양자상은 비행하는 모습처럼 몸을 옆으로 튼 채 천의와 구름이 뒤로 날리는 율동감이 잘 묘사되어 있지만 통일신라 종의 천의에 비해 경직되고 도식화된 모습은 시대적인 차이를 느끼게 한다. 비천상 아래와 천의 뒤로 표현된 율동적인 쌍구의 운문(雲文)은 일본의 엔조지(園城寺) 소장 종(1032년)이나 후쿠오카시(福岡市) 쇼우텐지(承天寺) 소장 종(1065년)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제작 시기는 11세기를 넘지 않는 고려 전기의 범종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 종의 공양비천상은 일본의 후쿠오카현(福岡縣) 아사쿠라시(朝倉市) 엔세이지(圓淸寺)에 소장된 고려시대 범종과 크기나 문양이 거의 동일한 점에 주목된다. 특히 용뉴와 음통이 남아있지 않지만 종신 높이가 원성사종과 같은 69cm라는 점과 비천상의 형식, 상·하대의 문양이 거의 동일한 점에서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더 나아가 제작자 내지는 동일 문양판(文樣板)이 사용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