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의 해인사종을 마지막으로 16세기 중엽까지 범종의 제작은 감소되었던 듯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년명(紀年銘) 범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5, 60년의 공백기를 지나면서 조선중기의 범종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 즉 전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던 종과 한국 종과의 혼합을 이루는 혼합형 범종, 그리고 미미하게 계승되었던 한국 전통형을 따른 범종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 백련사종(白蓮寺鐘, 1569년), 광흥사종(廣興寺鐘, 1573년), 안정사종(安靜寺鐘, 1580년)과 태안사종(泰安寺鐘, 1581년), 갑사종(甲寺鐘, 1584년) 등이 알려져 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혼합형 종과 전통형 종은 두 가지 커다란 양식으로 정착되어 조선후기 범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광흥사 동종은 전통형을 따른 범종으로서, 중국 종을 따르면서도 한국 종 양식이 가미되어 적절히 혼합을 이루는 갑사종과 함께 16세기 범종의 과도기적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크기는 비록 60㎝정도이며 세부의 문양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절제된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안정된 자세,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이 4면에 새겨져 있는데, 이 범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이다. 이 보살입상은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조선 중기의 불화에서 나타나는 보살입상의 양식적 특징을 공예적으로 잘 소화해 내고 있다.
기록된 명문에는 하가산(下柯山) 수암사(䒘菴寺)에서 백사십 근의 중량을 들여 제작되었다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나 절의 원 소재지인 수암사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아울러 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주장(鑄匠) 김자산(金慈山) 그리고 화원(畵圓) 원오비구(元悟比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장(私匠)과 승장(僧匠)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어 당시 장인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