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마총에서는 3점의 큰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무덤의 주인공은 가운데 용무늬가 투조된 큰칼을 차고 매장되었고 세고리의 큰칼과 둥근머리의 큰칼은 주변에 부장되었다.
신라의 고분 속에서 발견된 큰칼[大刀]은 대부분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고, 칼 고리 부분이 용이나 봉황, 세고리[三累], 세잎[三葉] 등과 같은 장식적인 무늬인 경우가 많다. 칼 고리 안에 표현된 장식 가운데 용이나 봉황이 보다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시대적으로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원형의 고리로만 된 것이 조금 오래된 양식이며 점차 고리 안에 세잎을 세운 큰칼과 세 개의 둥근 고리를 연접시켜 만든 세고리 큰칼이 그 다음 시기부터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거의 동시에 단독의 봉황문 고리 장식이 나타나고 이후 쌍룡문과 쌍봉문이 투조 장식된 큰칼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손잡이 부분은 보통 넓은 금판이나 은판으로 감쌌고 여기에 물고기 비늘 무늬를 촘촘히 새겼으며 두 쪽의 나무를 붙여 칼집을 만든 뒤, 위아래 쪽에 금 또는 은판을 감싼 다음 못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표면에는 칠을 하거나 금은판을 씌워 장식하기도 하였으며 간혹 작은 새끼칼[子刀]을 부착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큰칼은 직접적인 살상용 무기라기보다 금관이나 귀고리, 허리띠장식 등 금은 세공품과 마찬가지로, 소유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추정된다. 특히 큰칼의 소유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었던 듯 큰칼은 반드시 남성만이 소유했으며 왼쪽 허리춤에 패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금령총처럼 왕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칼의 경우, 크기만 조금 작을 뿐 왕의 칼만큼 화려하며 비록 왕비라 하여도 칼을 차고 발견된 예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그 같은 점이 확인된다. 아울러 처음에는 경주의 왕과 귀족 가운데 남성만이 장식된 큰칼을 찰 수 있었으나, 곧 각 지방의 지배층들도 경주에서 만든 큰칼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는 경주의 신라 왕이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지방 유력자들에게 충성을 맹세 받고, 금동관이나 이처럼 보검을 하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라에서 용무늬 큰칼이 출토된 무덤은 천마총을 비롯하여 식리총(飾履塚), 호우총(壺衧塚)에 불과하다. 이중 식리총 큰칼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목을 휘감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반면에, 천마총의 큰칼에는 한 마리의 용만이 표현되어 있다.
천마총의 용무늬 큰칼은 피장자의 왼쪽에서 발견된 것으로 칼자루에 손상이 있을 뿐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칼의 고리와 손잡이는 금동제로 이루어졌고 칼집은 나무로 만든 뒤 금동제를 감쌌는데, 칼집 표면에는 조그마한 새끼칼과 비늘 모양의 장식이 덧붙여져 있다. 칼집의 중단쯤에 옆으로 돌출된 네모꼴 장식이 붙어있어 끈을 매어 달았던 곳으로 보인다.
고리는 옆으로 긴 타원형으로서 단면이 팔각을 이루었다. 고리 안에 투조된 봉황은 머리가 큰 편으로서 앞 쪽으로 두툼한 부리가 돌출되었으며 뒤쪽은 뿔처럼 위쪽으로 말려 올라간 모습이다. 봉황의 머리에서 이어진 몸이 고리가 되어 한 바퀴 감아 돌고 있는 모습이다. 칼집 중단에 붙은 작은 칼의 고리 부분에도 거의 동일한 형태의 봉황이 표현되었다. 황남대총의 세고리[三累] 큰칼 보다는 좀 더 발전된 양식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