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솔리 석불 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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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조각
유물
문화재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쌍미륵사에 있는 태봉 때의 석불입상.
이칭
이칭
남·여미륵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1973년 07월 10일 지정)
소재지
경기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산33-1번지
목차
정의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쌍미륵사에 있는 태봉 때의 석불입상.
내용

기솔리 석불입상은 쌍미륵사 요사 뒤편의 2단 석축 위에 있다. 각각 10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는 약 5.7m이다. 마을 주민들은 동쪽의 것을 ‘남미륵’, 서쪽의 것을 ‘여미륵’이라 칭하고 있다. 석불입상은 양쪽 모두 나발이 표현되지 않은 육계를 갖고 있으며 육계 위에는 판석형 보개가 있다. 두 석불은 얼굴의 크기와 상호의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높은 육계, 반개한 눈, 상대적으로 짧은 코 등에서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남미륵이라 불리는 동쪽 석불입상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입술의 중앙 부분에는 윗입술부터 아랫입술까지 세로의 도드라진 선이 새겨져 있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그동안 고려시대 전기 또는 중기에 조성된 지방 양식의 불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 보다 앞선 시기인 궁예(弓裔) 정권기에 조성되었음이 규명되었다. 우선 기솔리 석불입상은 신체의 모양, 옷 주름, 발 형태 등에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매우 유사하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936년에서 940년 사이의 시기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기솔리 석불입상은 안성·이천 지역의 기년명 석불 및 고려전기 석조불상과 양식적 특징을 비교해 보면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다 먼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솔리 석불입상의 법의 착용 방식과 옷 주름 표현 등은 통일신라 금동불상을 직접 모방하였는데, 이는 이 석불입상이 새로운 외래 양식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다 조성시기가 앞선 것을 보여준다.

한편, 기솔리 석불입상은 조성 규모 면에서 볼 때 200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석불이다. 고려시대 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의 효율성을 고려해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한 개체의 불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은 머리부터 발까지 하나의 돌로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는 석불 제작 시 대규모 지원이 가능한 후원 세력이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는데, 당시 도적이 발흥하고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던 죽주지역에서 200명 이상의 사람을 동원하여 대규모 석불을 조성하도록 지원한 세력으로는 궁예정권을 상정할 수 있다.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 조성되었을 가능성은 상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두 개의 석불입상 중 ‘남미륵’으로 불리는 동쪽 석불입상의 상호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래의 상호가 입을 벌린 채 조각된 경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인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었던 불상의 입을 벌릴 수 있게 한 사람은 스스로 미륵이 된 궁예로 여겨진다. 불상의 입을 벌려 상호를 조각한 모습은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원 동송읍 마애불입상에서도 확인된다. 동송읍 마애불입상의 입술은 마모가 심하여 선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잔존해 있는 입술 모양을 보았을 때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의 연구를 통해 궁예 미륵으로 밝혀진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 역시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며 기솔리 석불입상과 같이 입술 중앙에 도드라진 선이 가로 지르고 있다.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과 마애불이 모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궁예가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였던 점을 상기하면 불상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하생한 미륵이 설법하는 장면일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 화살이 걸쳐진 활 모양의 입을 통해서 활의 후예라는 ‘궁예’의 이름을 반영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궁예 미륵일 가능성은 구비전승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재 이 석불입상과 관련해서는 궁예의 설법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된 사람들이 미륵상을 세웠다는 구비전승이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궁예 관련 설화는 집중성과 구체성,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궁예 관련 설화는 궁예가 활동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궁예 설화는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는 통일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설화의 특징과 더불어 궁예 미륵이라 불리는 명칭적 성격 또한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에 조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전국에 궁예 미륵으로 불리는 불상은 기솔리 석불입상과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이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조성 시기 파악이 어려우나 나말여초기 제작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궁예 미륵이라 칭해지며 통일신라 불상조각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기솔리 석불입상은 실제 궁예에 의해 조성되었기에 지금까지 궁예 미륵으로 전칭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궁예가 기솔리 석불입상을 현재의 장소에 건립한 이유는 비뇌성 전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뇌성 전투는 궁예와 양길의 전쟁으로 궁예가 중부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이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비뇌성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궁예가 승전지에 조성한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정성권, 학연문화사, 2015)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의 조성시기와 배경」(정성권, 『신라사학보』31, 2014)
「궁예와 양길의 전쟁, 비뇌성 전투에 관한 고찰」(정성권, 『군사』83, 2012)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연구: 궁예 정권기 조성 가능성에 대한 고찰」(정성권, 『신라사학보』25, 2012)
「철원 지역의 궁예 전승과 고려 재건에 대한 평가」(이재범, 『고려 건국기 사회동향 연구』, 2010)
집필자
정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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