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송곡(松谷).
1402년(태종 2) 상호군으로서 경상·전라·충청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병선을 점검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근무상황을 규찰하였다.
같은 해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키자 안변에 파견되어 교서를 반포하고 민심을 위무하였다. 1406년 좌군총제(左軍摠制) 재직 중 조사의의 난 평정에 기여한 공으로 군공 1등에 등제되면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고,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07년 삼군총제서로 명나라에 관마진헌을 위한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이 설치되면서 그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408년 전라도도절제사 때에 천거한 만호 박광계(朴光桂)·허승량(許承亮)이 탐관오리로 죄를 받게 되자 천거의 책임을 추궁당한 뒤 면직되었다.
그러나 곧 풍해도(지금의 황해도) 병마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에 기용되었고, 1409년 전렵군(田獵軍)의 수를 가정(加定)하고 자제패(子弟牌)를 만들어 이들을 부방(赴防)하게 한 일로 다시 면직되었다.
그 전국에 걸친 11도병마도절제사의 설치와 함께 다시풍해도병마도절제사(豐海道兵馬都節制使)에 서용되었으며, 1410년에 사직하였다. 무예에 능하였고,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경·외의 군정에 기여한 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