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높이 350㎝, 비신의 높이 185.5㎝, 폭 85.5㎝, 두께 22.5㎝. 1984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김계휘 신도비가 있는 고정리에는 김계휘의 묘소 외에도 광산 김씨 가문의 유적이 많이 모여 있다. 신도비는 1604년(선조 37)에 건립하였는데, 당초에는 마을 안에 있던 것을 후에 마을 입구로 옮겼다.
신도비는 높은 비좌(碑座)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반원의 운용문(雲龍文) 이수(螭首)를 올린 형태로, 이수와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좌(碑座)는 화강암이다. 이수의 앞 · 뒤 면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가지고 다투는 형상을 조각하였는데, 조선 중기의 조각 기법으로 조형이 매우 정교하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전 · 후 양면에 글씨를 새겼는데, ‘대사헌김공신도비(大司憲金公神道碑)’라 되어 있는 두전(頭篆)은 김상용(金尙容)의 글씨이며,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다.
비의 주인공 김계휘(1526∼1582)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이며, 연산출신이다.
김계휘는 1549년(명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에 임명된 후, 사관 · 부수찬 · 전직 ·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557년(명종 12)에는 일시 파직 당하자, 낙향하여 연산현의 벌곡 양산리에 정회당(靜會堂)을 설치하고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562년(명종 17) 이조정랑으로 재등용되었고, 156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582년(선조 15)에는 예조참판이 되었고,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