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32개의 부채꼴 판석을 깔아 8각 지대(地臺)를 만들어 8각의 돌난간을 세우고 그 중앙에 석종형(石鐘形) 태실과 8각 옥개석을 놓았으며, 이 태실의 서북쪽으로 3개의 태실비(胎室碑)가 서 있다.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椿齡阿只氏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는 남쪽의 비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1538년(중종 33)에 태실을 만들면서 세운 것이고, ‘왕자전하태실(王子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는 북쪽의 비는 인종(仁宗)의 승하로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심해야 하기 때문에 1546년(명종 1)에 세운 것이다.
중앙의 비는 1711년(숙종 37)에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왕자전하태실비’를 개각하여 세운 것으로,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를 가졌다. 비신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태실의 관리는 관할구역 관리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벌목 · 채석 · 개간 등을 하였을 때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고 있었으므로, 명종 태실도 대체로 양호하게 관리되었다.
그러나, 선조조에는 한때 지역 품관(品官)의 투장(偸葬) 사건과 태실난간 훼손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일제시대 이후에는 돌보지 않아 석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1986년 11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3월 보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