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높이 335㎝. 귀부의 규모는 높이 70㎝, 길이 285㎝, 너비 190㎝이고, 비신의 규모는 높이 210㎝, 너비 104㎝, 폭 32㎝이며, 이수의 높이는 55㎝이다. 1979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된 연평부원군 이귀(李貴, 1557∼1633)의 신도비는 화강암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귀부(龜趺)로 된 비좌(碑座) 위에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이 올려져 있는데, 이수(螭首)의 운용문(雲龍文)은 쌍룡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귀부는 목 표현이 생략된 채, 귀두(龜頭)가 수평으로 내밀어 자라 머리를 하고 있다.
비신의 전후 양면에 글씨를 새겼는데, 세자사부(世子師傅) 조익(趙翼)이 비문을 찬(撰)하고,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贈議政府領議政延平府院君諡忠定李公神道碑銘(증의정부영의정연평부원군시충정이공신도비명)”이라 되어 있는 두전(頭篆)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여이징(呂爾徵)이 전서(篆書)를 썼다. 묘소는 신도비의 북서쪽 계성산 산록에 있으며, 묘비는 1641년(인조 19)에 건립되었는데, 이식(李植)이 찬(撰)했다.
이귀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세조 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 손으로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과 종사관(從事官)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623년(인조 원년)에는 김류(金瑬)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반정을 성공시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최명길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 후에 연평부원군에 봉하여졌고, 사후(死後) 영의정에 추증되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