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천리구(千里駒). 경기도 개성 출신.
1908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유학하여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21년에 동아일보 제2대 조사부장이 되었으며, 1924년 5월에 이 회사를 퇴사하였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 민원식(閔瑗植)·남상일(南相一)·남정린(南廷麟) 등과 합동통신사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합동통신사 제3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 1964년까지 고문직에 있었다. 또한, 언론계뿐만 아니라 관계로 진출하여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에는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에 민의원 사무처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0년 8월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을 순방중이던 미국 국회의원시찰단을 우리 나라에 유치하여 일제 식민치하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21년 10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만국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군축회의에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참석하여 취재활동을 폈다.
우리 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해외특파원, 국제기자대회 최초의 참석자, 최초의 군정청 여권소지자, 맥아더(MacArthur,D.)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기자 등 언론인으로서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론인이며 문필가로서 ≪신문학≫·≪중남미기행 中南美紀行≫·≪한영사전≫·≪열국지 列國誌≫·≪삼국지≫·≪그레이트 칸≫·≪중국문화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1924년에 펴낸 ≪신문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학 이론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