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평안북도 철산 출신.
1910년 평양 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선천으로 이주하였고, 같은 해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이 선천을 통과할 때, 우리 나라의 독립을 희망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 의원단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경찰서를 폭발하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같은 해 9월 광복군총영 결사대원 박치의(朴致毅)가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에 관련되어 붙잡혔다. 1921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았다.
1928년 평안북도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 교무를 보다가 광복이 되자 선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6·25남침 때 유엔군이 북진하여 선천으로 진격해오자 이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곧 후퇴해버리자 북로당원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