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숭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예, 사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희지(禧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나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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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사예, 사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지(禧之). 증조는 동지밀직사사 김백균(金伯鈞)이고, 할아버지는 김진(金進)이며, 아버지는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김충손(金衷孫)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0(성종 11)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고, 이어서 정자를 거쳐 1501년 정언(正言), 1504년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사예(司藝)로서 문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이어 헌납(獻納)에 기용되어 민간의 가사(家舍)를 탈취한 권령(權齡), 수령으로 재임 때 남형(濫刑: 지나친 형벌을 내림)과 징렴(徵斂: 세금을 거둬들임)을 일삼은 박세준(朴世俊), 가동(家僮)을 보내어 외방 수령을 징색(徵索: 세금징수를 위한 수색)한 정세명(丁世明) 등을 추국(推鞫: 신문)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또, 시폐를 논하고 정지(定志)·중작(重爵)·납간(納諫)·절용(節用)·친현사(親賢士)·원참녕(遠讒侫)·흥학교(興學校)·정사습(正士習)·억환자(抑宦者)·보외척(保外戚)·명상벌(明賞罰)·휼민(恤民) 등 12조를 헌의(獻議: 왕에게 건의함)하였다.

그 해 사예(司藝)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대한 논상(論賞: 상에 대하여 논함)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514년(중종 9) 집의(執義), 이듬해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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