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옥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결사, 강화유수, 장례원판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수(君粹)
미산(薇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6년(선조 29)
사망 연도
1662년(현종 3)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장례원판결사
정의
조선 후기에, 판결사, 강화유수, 장례원판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군수(君粹), 호는 미산(薇山). 할아버지는 김대진(金大振)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김우급(金友伋)이며, 어머니는 유경진(柳景進)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學諭)·검열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도보로 강화까지 왕을 호종했으며, 환도 후 봉교(奉敎)·전적(典籍)·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향리에서 김지수(金地粹)와 함께 싸움터로 가는 도중 체부(體府)의 격문을 보고 함평(咸平)에서 의병을 일으켜 방어에 임하다가 상경했으나,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군사를 해산하였다.

이어 지평·장령(掌令)·정언(正言)·사간·집의(執義)·필선(弼善) 등을 역임하고, 여산군수(礪山郡守)로 나가 기민(飢民)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자 진강(陳講 : 강의함)의 기회를 얻어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647년 밀양부사로 나가 현저한 치적을 쌓았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뒤 한성부우윤에 임명되고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충청도의 관찰사가 되었으나 대동법 실시의 불합리성을 주장하다가 체직되었다.

그 뒤 부총관(副摠管)·형조참판을 거쳐 광주부윤이 되었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렸다. 그러다가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판결사(判決事)로 전직해 노비송안(奴婢訟案)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나, 병을 얻어 파산(坡山)의 집으로 돌아가 치유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명재유고(明齋遺稿)』
『남계집(南溪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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