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찬영(讚永). 1919년에 김동인(金東仁)·김억(金億)·전영택(田榮澤)·주요한(朱耀翰)·김환(金煥)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동인지 『창조(創造)』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론과 희곡을 몇 편 썼을 뿐, 적극적인 문단활동이나 연극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비평의 경우, 김동인과 염상섭(廉想涉)의 논전에 끼어들어 「작품에 대한 평가적 가치」라는 평을 쓰기도 했다.
비록 그는 본격적인 극작가는 아니었지만 극작가가 영성했던 1920년대 초에 몇 편의 희곡을 통해 식민지현실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종교를 빌려 우회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작품인 「배교자(背敎者)」(1923), 하급노동자들의 실직과 가난을 통해 식민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그린 「삼천오백냥(三千五百兩)」(1924) 등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