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구(金球 또는 金龜). 호는 백송(白松). 평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배포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평양숭실학교(崇實學校) 교사 및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여 회원 70여 명을 확보, 선봉대 구실을 하며 활동하다가 기소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비서로 근무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국내와의 연락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평양에 잠입했다가 조선총독부경찰에 잡혔으나 가족의 협조로 다시 상해로 탈출한 뒤 만주의 연길현(延吉縣) 쌍하진(雙河鎭)에서 한인자위단장(韓人自衛團長)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공채모집(公債募集)을 위하여 또다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활약하였으며, 1925년에는 중국 산둥성(山東省)과 진남포 등지의 연락조직책으로 귀국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정의부(正義府)가 세력만회를 위해 간부진을 개선할 때 만주 액목현 지방총관에 선임되었으며, 그 곳 납법구 교하중아학교(蛟河中亞學校) 교장으로 있으면서 정의부 중앙상임대의원이 되었다.
1930년 8월 국민부(國民府)가 길흑특별위원회(吉黑特別委員會)를 편성할 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