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학의(金鶴儀)이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일제시기 일본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운동가로 1949년 9월 일본공산당에서 축출되어 북한으로 간 후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고 이후 불문(佛門)에 입문하여, 19세인 1916년에 서울의 중앙학림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고향에서 해산물상을 하였고, 동시에 야학을 열어 지방의 농민을 교육하였다. 1921년 동경(東京)에 가서 토목노동을 하면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중퇴하였다.
1922년 여름 동경조선노동동맹회 결성에 참가하여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 노동자의 복리증진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요코하마(橫浜) 일대에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1925년 1월 동경에서 창립된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요코하마시에서 카나가와현(神奈川縣)조선합동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상무집행위원이 되었고, 1927년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가 주도한 가나카와현조선합동노동조합은 요코하마노동자의 인구비례에 비하면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 1926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8년 5월 중앙집행위원장 겸 쟁의부장이 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일본총국 나부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1928년 6월 초순 남부야체이카 회의에 참석해 정희영의 보고에 기초하여 투쟁 방향에 대해 협의하였다. 1928년 6월 24일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개편의 내용을 송창렴(宋昌濂)으로부터 들었고 본인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된 것을 접수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송창염으로부터 당의 연혁, 조직의 대요, 입당 수속 등에 대해 보고 받았고, 계속된 간부회의에서 동부야체이카 책임을 맡고 지속적으로 일본총국을 지도하였다. 8월 국치일 기념투쟁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1931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옥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3·1운동기념투쟁, 메이데이투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감방신문』을 발행하였다. 특히 1국 1당주의에 따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일본공산당 내로 해소될 때 옥내에서 주도하였고, 공판 때는 공산주의운동사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진술을 시도하였다. 1932년 6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던중 사노마나부(佐野學)의 전향성명서를 접하고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다.
1935년 12월 재일조선인노동자들의 계몽과 일본 인민전선을 실현하기 위해 동경에서 발간된 『조선신문』의 창립을 원조하였고, 지국 설립에 노력하였다. 1937년일본인민전선 탄압과 관련하여 검거, 투옥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42년 9월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동경예방구금소(東京豫防拘禁所)에 구금되었고, 이때 일본공산당 옥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출옥하자 비전향 일본공산주의자 6인과 함께 일본공산당 확대강화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었고, 12월일본공산당 중앙위원, 조선인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고,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 2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겸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0월재일본조선인연맹 제5차대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축하를 위한 조국경축사절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9월일본공산당에서 추방되어 1950년 북한으로 갔다. 이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교육부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앙선거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망 시기와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 정부에 의해 1953년과 1958년 두 차례 걸쳐 노동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