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반(金鎬盤)은 1902년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11년에 부모와 함께 연해주로 건너갔다. 이명은 김호반(金浩盤)이다. 19111914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노동을 하면서 보통학교를 마쳤다. 19181919년 5월까지 북간도 조선인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1920년 9월 자유시(自由市: 알렉세예프스크) 한인보병대대에 입대하였고, 11월에 공산청년동맹에 들어갔다. 1921년에 고려혁명군에 참가하였으며, 5월에는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르쿠츠크의 적군(赤軍) 5군 산하에 당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울란우데〔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하였으며, 1923년 3월까지 러시아 공산당 연해주 그로데코보 구역의 서기를 역임하였다. 1923년 4월 코르뷰로의 지시에 따라 북간도로 파견되어 6월에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지부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0월에는 연해주로 돌아가서 러시아 공산당 포시에트 구역 서기를 지냈다. 1924년 5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공산청년회 블라디보스토크 제2구역 서기를 역임하고, 10월부터 1925년 8월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 10월 수배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되돌아갔으며, 1928년 이론 강화를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1930년 3월 태평양노조 블라디보스토크 사무국 위원이 되었고,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로핀테른(Profintern) 제5차 대회에 조선대표단의 통역으로 참석하였다. 1931년 2월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나, 7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인 함흥질소비료회사의 공장 지대를 토대로 전력을 가하여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화학 · 금속 · 철도 · 목공 등의 영역에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나아가 조선 각 도시에 동일한 조직체를 두고자 하였으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김호반 외 17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1933년 3월 함흥지법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