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낙죽은 죽물(竹物)의 표면장식으로 성행되었는데, 무늬를 매우 가늘게 선묘(線描)하므로 대개 합죽선 · 연죽설대 · 참빗 · 바느질자 · 붓대 등 소품에 많이 애용되었으며, 죽장(竹裝) 문방구에 응용되기도 하였다.
낙죽의 발달과정은 명확한 문헌이나 유물에 의하여 밝힐 수는 없다. 『경국대전』에서 명시한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에도 낙죽장은 포함되지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 말기 기록에 단편적으로 엿보일 뿐인데, 8도 각지의 주요 물산을 열거하는 가운데 ‘통영낙(統營烙)’이라 하였고, 『임원경제지』에서도 비슷한 시문(施文)방법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중국 공예사에서는 공예지서화(工藝之書畫)의 한 양식으로 탕화(燙畫)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9세기 나주 서화가 중에는 유독 낙화(烙畫)를 잘하여 화화도인(火畫道人)이라 불리었던 박창규(朴昌圭)가 있었는데, 그의 낙화는 종이나 깁에 그림을 그렸음을 뜻한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작자 미상의 「경직도 병풍」 가운데 정교한 필치의 낙화작품이 전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오죽(烏竹 : 껍질이 검은 대나무)이나 반죽(斑竹 : 죽세품에 널리 쓰이는 대의 일종)이 귀한 탓으로 낙죽에 대한 기호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합죽선 · 참빗 · 설대 등의 사용이 격감됨에 따라 낙죽 또한 동시에 쇠퇴해 버렸다.
고도의 낙죽 솜씨는 빠른 속도의 인두질과 정확한 묘사력, 곧 필력(筆力)에 있다. 뇌문 · 운문 · 귀갑문 · 국화문 등의 도식화한 반복무늬를 비롯하여 박쥐 · 송학 · 산수 · 어해 · 매란 등 회화적인 표현도 하며, 혹은 세필의 숱한 글자를 써넣기도 한다. 첫 기능보유자는 이동련(李同連)이며, 현재의 기능보유자는 전라남도 담양의 국양문(鞠良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