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양(英陽). 경상북도 청송 출생.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35년 동경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하고, 이어서 2년간의 연구 과정을 수료하였다.
수료 후에 광복 직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이 시기 동경의 문부성미술전(文部省美術展) · 동광회전(東光會展) · 국화회전(國畵會展) 등에 출품하였던 작품은 서정적 색감과 표현적 자율성의 인물화와 풍경화였다.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해서는 1947년 이쾌대(李快大) · 이인성(李仁星) · 이규상(李揆祥)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49년까지 연례 회원 작품전을 가지며 두드러진 역량을 내보였다.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지기도 하여 1949년 제1회 국전(國展)에서 일약 서양화부 추천 작가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52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에서 보게 되었던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도쿄비엔날레]과 파리의 살롱 드 메 동경전은 그 뒤의 남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4년의 프랑스행을 결행한 것은 그때의 충격적 자극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서울에서 개최된 도불 기념전 작품은 동경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반영한 추상적인 화면이 과반수였다.
파리에 가서는 추상적 표현의 심상주의 형태를 심화시키면서 독특한 작업을 구현시켰다. 그 내면적 순수 형상은 6·25의 비극적 상황 체험에서 비롯된 정신적 표현 의지의 상징성과 시간 · 공간 및 역사의 어떤 표상을 내재시킨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1958년부터는 파리의 살롱 드 메에 초대되었고, 1961년의 출품작 「동양의 풍경」은 프랑스 정부가 사들여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1962년 작품 「허물어진 제단(祭壇)」은 파리시가 구입하여 현재 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에서의 그러한 예술적 성공은 1966년 남프랑스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명제된 대작이 1등상에 오르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앞에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동양적 심성의 내면적 시각과 정신적 표현성의 은밀하고 매혹적인 색상 분위기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 세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읽을 수 없는 문자성 혹은 동양적 문자성의 화면 창조 또는 콜라주 형상으로 추구되어 갔다. 나아가서 석기시대 유물 또는 고분 출토의 청동 유물을 연상시키는 조형 형상과 사람의 해골에 연관된 「마스크」 연작이 이어졌다. 그 표현적 상념은 신비롭고 찬란한 표현미로 거듭 확대되었다.
1968년에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역사의 흔적」(1963년) · 「센 강변」(1968년), 삼성미술관에 「대화 · 절규」등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