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유채. 세로 97.5㎝, 가로 13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35년 일본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한 남관은 1955년 파리로 건너가 당시 그곳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1968년 귀국할 때까지 파리에서 14년을 보내면서 남관은 완전히 추상미술 작가로 탈바꿈했다. 파리 체류 초기에는 반추상의 작품을 그렸으나 점차 다양한 추상미술을 접하게 되었고, 1960년대를 전후하여 의식의 심연이나 역사의 흔적과 같은 심상적인 추상표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1963년작 「역사의 흔적」은 재현적 이미지가 사라진 순수한 추상 화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흘리고 번지는 우연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캔버스에 종이를 붙이고 그 위로 칠하거나 번지게 한 뒤 이를 제거하여 그 흔적에 색상을 다시 넣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화면 위에서는 특이한 형상들이 드러나고 그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조성된다. 「역사의 흔적」에서는 하얀 배경 위에 마치 오래된 성터의 이끼 낀 돌과 같은 형상들이 드러나 있으며 이는 시간의 변화와 역사의 흔적을 암시한다. 또한 화면 위의 물질들이 제거되면서 입체적인 형태의 단층들이 쌓여가고 마치 부서진 잔해와 같은 모습으로 화면 위에서 폐허의 공간을 창출해 낸다.
이러한 콜라쥬와 채색을 병용하여 시간의 퇴적을 상기시키는 남관의 작품들은 1960년작 「황폐한 뜰」에서부터 「환상」(1962), 「허물어진 제단」(1962), 「허물어진 고적」(1964), 「자색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4),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 「세느 강변」(1968)에 이르기까지 파리 체류 시기에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