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 ()

회화
인물
해방 이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화가. 서양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9년경
사망 연도
1993년
본관
달성(達城)
출생지
대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 이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화가. 서양화가.
개설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로 1930년대 초반 대구지역의 미술단체인 향토회(鄕土會)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3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대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데이고쿠(帝國)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우메하라 류우사브로(梅原龍三郞)의 지도를 받았다. 일본 유학 중 광풍회(光風會), 춘양회(春陽會)등 일본의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1931년 맏형이었던 서병진(徐丙鎭)이 장티푸스로 요절하자 졸업 1년을 앞두고 귀국했다. 대구에 돌아온 후 대구 이시비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향토회(鄕土會)에 가입하면서 작품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1933년서진달(徐鎭達), 최화수(崔華秀), 배명학(裵命鶴)과 함게 양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이후 후진 양성에도 주력했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화가로서의 활동은 보이지 않았으나 1962년부터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1963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대구와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그의 개인전에는 데이고쿠미술학교 시절 동창이었던 고바야시 료우소(小林良曹)가 참여했다. 1979년일본 다카자기(高崎)시 야스나로화랑에서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33. 6. 16)
『매일신보』(1935. 11. 6)
『조선일보』(1963. 7. 16)
『경향신문』(1979. 5. 14)
「작가발굴-서병기 대구의 향토작가」(이일,『월간미술』, 1996. 3)
「작가발굴-서병기 초연한 삶, 초연한 예술」(서성록,『월간미술』, 1996.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