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의 서양화가로 1930년대 초반 대구지역의 미술단체인 향토회(鄕土會)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3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대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데이고쿠(帝國)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우메하라 류우사브로(梅原龍三郞)의 지도를 받았다. 일본 유학 중 광풍회(光風會), 춘양회(春陽會)등 일본의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1931년 맏형이었던 서병진(徐丙鎭)이 장티푸스로 요절하자 졸업 1년을 앞두고 귀국했다. 대구에 돌아온 후 대구 이시비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향토회(鄕土會)에 가입하면서 작품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1933년서진달(徐鎭達), 최화수(崔華秀), 배명학(裵命鶴)과 함게 양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이후 후진 양성에도 주력했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화가로서의 활동은 보이지 않았으나 1962년부터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1963년 경북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대구와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그의 개인전에는 데이고쿠미술학교 시절 동창이었던 고바야시 료우소(小林良曹)가 참여했다. 1979년일본 다카자기(高崎)시 야스나로화랑에서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