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자유(自有), 호는 직곡(直谷).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응운(南應雲)이고, 아버지는 참판 남호(南琥), 어머니는 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이조판서 남이공(南以恭)의 형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93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으며 주서·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예조정랑을 지냈다.
1596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는데, 이 때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이 왜적 포로 가운데 우리 나라 사람이 있으므로 이를 관찰사에게 압송하려 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아우 홍인간(洪仁侃)이 동족을 해친 자들이라 하여 살해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마치 공상(功賞)을 탐낸 나머지 참살한 것처럼 무고한 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색낭청(色郎廳)의 파직을 건의했다.
또한, 행정 능력이 없는데다가 아들 혼사에 민간으로부터 재물을 징렴한 덕천군수(德川郡守) 정대길(鄭大吉)과 매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물어서 처리해 하리들의 조롱을 받고 민간을 침학해 피해를 입힌 서산군수 박규영(朴葵英)의 파직을 상소했다.
159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조운(漕運)에 태만한 군자감정(軍資監正) 유사원(柳思援), 사사로운 가정일에 역마(驛馬)를 사용한 통제사종사관(統制使從事官) 윤동로(尹東老)의 파직을 상소했다.
이어서 장령·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경상도관찰사에 30세의 연소한 이시발(李時發)이 임명되자, 병란으로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왜적과 대치한 중요한 곳임을 들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1599년 승지·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그 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양주(楊州)·광주(廣州) 일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 피해가 크자 이를 포획하지 못한 책임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01년에 안변부사, 1604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606년에는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1608년에 대사간이 되었다.